3학년 1반

서로 돕고 함께 배우며 행복을 나누는 우리반

정직하고 성실하며 배려하는 어린이
  • 선생님 : 오경자
  • 학생수 : 남 5명 / 여 7명

신의련 이야기

이름 안이국 등록일 16.09.01 조회수 4

신의련()[1546~1606]의 자는 의숙(), 호는 미계(), 본관은 거창으로 양렬공() 신이충()의 7대손이다. 1581년(선조 14) 백운 노촌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의 병구완을 위해 한 겨울에 꿩과 잉어를 구하여 간호하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의련은 전란 중에도 부친의 간호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난을 피하기 위해 신의련이 살고 있는 깊숙한 산골에 들어왔다. 그곳이 오늘의 비사동 골짜기이다.

한편, 왜군들이 신의련의 집에 침입하자 신의련이 방문 앞을 가로 막으며, “나는 죽어도 좋으니 병석에 누워 계신 우리 부친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고 이에 감동한 왜장은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나 효성을 실제로 보기 위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효자 신의련’ 다섯 글자를 써 보라고 했다. 신의련이 다섯 글자를 써서 왜장에게 주니 종이를 불태웠지만 ‘효자 신의련’ 다섯 글자는 불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한다. 이를 본 왜장은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감탄하면서 귀중품을 주고 ‘이 곳은 하늘이 아는 효자가 살고 있으니 침범하지 말라’는 표방을 동구 밖에 써 붙이고 부하들을 데리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 때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1만여 명이 무사히 피난을 하였다 하여 그 후부터 이 골짜기를 ‘만인동’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유재란에도 여전히 왜적이 침범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신의련의 덕이라고 여겼으며, 미계촌 앞에 높이 솟아 있는 산을 덕태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미계촌은 지금의 원노촌의 다른 이름이다. 전쟁이 끝나고 신의련이 죽은 후에 이 이야기를 들은 고을 원님이 선조에게 고했고, 종8품에 해당하는 수의부위() 라는 벼슬을 증직하고 효자각을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효자 이야기가 전해 오는 원노촌 마을 [孝子 이야기가 전해 오는 元蘆村 마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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