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1반

안녕하세요. 여러분! 항상 건강하고 밝은 우리반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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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백은솔 등록일 18.05.01 조회수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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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비는 내일 할거임 나 폰으로 해서 한컴으로 다시 해서 복사해야할것 같아
확인하면 댓글좀 비밀글하게
국내성의 문화제
개념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

"주몽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에 이르렀다"
고 하였는데, 졸본은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였던 흘승골성과 같은 곳이다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지린성 지안형에 있는 성터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한 광개토 대왕릉비에 나오는 통규성이 국내성이라고 추측하고있다 국애성 성벽의 전체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약간 길다 고구려는 3~427년을 국내성을 수도로 삼았다사 427년(장수왕 15)평양으로 천도을 행하였다
천도:도읍을 옮김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재위 391∼412동안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 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영안, 동으로는 훈춘,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대왕은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 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아들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이 광개토대왕비이다. 이 비석은 사면석 비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 국강상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비는 집안시의 시청소재지인 통구성으로부터 동북쪽 약 4.5km 지점인 태왕촌 대비가에 서 있으며,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대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이 있다. 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비 주위에는 철책으로 된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너비 1.35m∼2.0m, 높이 6.39m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크기로 개석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다. 비신의 사면에는 한예의 팔분서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cm 정도 크기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으며, 현재에는 5mm 깊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비신의 4면에는 모두 44행 1,775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장군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석릉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에는 광개토왕릉비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사신총 등 석릉과 토분 1만 기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절석(切石)을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는데, 기단의 한 변 길이 33m, 높이 약 13m 이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둘레에 너비 30m 의 역석을 깔아 능역을 표시하였다. 널방은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 지었는데, 천장석이 있는 굴식이며, 2개의 널받침이 있다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E.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등이 조사하여 《남만주조사보고》 등에 발표한 뒤부터 학계에 알려졌다.

돌무지돌방무덤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의 것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현지 중국 학자들은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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