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rhakdj](/files/2019/12/oktong-e/f65d22ba5cdd454a9a8c56148663d06e.jpg)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6일 옥포와 합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 다음날에도 적진포에서 1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선대부로 승. 7월 8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해 사천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사천해전). 이 전투에서는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 7월 10일에는 당포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으며7월 13일에는 왜군이 도주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를 공격해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다 이러한 잇따른 승리로 이순신은 정2품 자헌대부가 되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8월 14일 견내량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한산도로 유인해 50여척의 왜선을 격파·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한산도대첩). 그리고 안골포에서 지원하러온 왜군을 다시 물리쳤으며(안골포해전), 10월 5일에는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에서 왜군의 병선 100여척을 파괴했다. 이순신은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으며, 9월에는 이러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침시켰고(제2차 당항포해전), 11월 11일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장문포해전).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둔전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요시라 라는인물이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 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왜군은 그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그러나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 해전에서왜군에게대패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1545~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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