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하늘 위
맑은 햇살 아래~
우리들 함께 가요
서로 손 잡고~
황진이(정지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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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최정빈 | 등록일 | 18.04.26 | 조회수 | 3 |
글꼴글꼴 작게글꼴 크게 역사인물 가운데 소설로, 혹은 영화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이 있지만, 이 가운데서 황진이(黃眞伊)만큼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인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소설로, 드라마로, 영화로도 수차례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여성은 일찍이 없었다. 그녀는 역사상 최고의 미모와 재능, 그리고 도전정신으로 충만했던 여성이었다. 체제를 넘어 남·북한에서 널리 사랑받은 인물역사인물로 여성을 중요시한 것은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왕비 출신이 아닌 일반 여성으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은 신사임당과 황진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신사임당이 황진이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 아님에도 신사임당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거의 없는 반면, 황진이는 매력적인 여성의 상징으로 세대를 달리하면서 늘 새로운 여인상을 만들어 냈다. 20세기 이후, 남·북한을 통틀어 그녀만큼 사랑받은 인물이 있었을까. 체제를 달리하는 만큼,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데 있어 남·북한의 간극은 태평양만큼이나 넓다. 그러나 황진이는 사회주의 체제든 자본주의 체제든 사랑받을 수 있는 여성 캐릭터였다. 전경린, 김탁환, 최인호가 황진이를 택했고 북한의 작가 홍석중이 황진이의 일대기를 그렸다. 남성 못지않은 기개가 있었던 인물정사이든 야사이든 과거 기록에 흔적을 남겨온 이는 남성들이다. 남성이 기록해온 역사에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여성들은 그리 많지 않다.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왕족 외에 기록을 남긴 여성들은 성 스캔들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감동이나 어우동 같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남성들만의 세상에 뛰어들어 남성을 파멸로 이끌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 마디로 악녀요 요부인 것이다. 남성들의 역사에서 보면 이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움을 무기로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들로 비쳐진다. 역사 기록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현모양처 혹은 요부이다. 하지만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몇 안되었던 시기에 황진이에 대한 기록들은 성녀도 아니요 요부도 아니다. 한 명의 기인(奇人)으로서 여성이지만, 남성 못지않은 기개가 있었던 인물로 그려진다. 황진이는 정사 기록에 나오는 인물은 아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들은 [송도기이(松都奇異)]나 [어우야담(於于野談)]과 같은 야사나 설화로 전해져 왔고, 20세기 이후에는 남·북한 역사소설에서 많이 다뤄지면서 이야기 살이 덧붙여졌다. 전해오는 모든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개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천민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진현금’이라고 불려지던 시각 장애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황진이라는 이름 또한 본명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황진’이 이름이고 ‘이’는 접미사라는 것이다. 신분상의 운명을 버리고 자유를 택하다황진이, 그녀의 신분은 기녀이다. 조선사회는 남성들에게 여성편력에 관한 한 관대했다. 하지만 규방의 여성들은 남성과의 접촉에서 제한적이었다. 관대함과 제한성이라는 상충된 환경에서 이 둘을 연결시킨 것이 ‘기녀’였다. 기녀는 조선사회에서 남성과 공식적으로 관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여성이었다. 기녀 출신인 황진이는 규방 출신의 감동이나 어우동과 달리 음란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시와 음악은 기녀라면 갖추어야 할 재능이었고, 아름다운 외모에 재능까지 갖춘 황진이는 남성들의 권력을 무너뜨리지 않는 기녀였다. 양반의 얼녀1)였던 황진이는 16세기 조선사회의 규범에 따라 양반의 첩이 될 운명이었다. 첩이라는 것이 정실 부인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는 것이지만, 사대부의 첩이라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처럼 자식도 서출이라는 신분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황진이는 신분상의 운명을 택하지 않고 자유를 택했다. 물론 기녀로 산다는 것 또한 신분상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기녀와는 달랐다. 당시 기녀들의 소망이었던 사대부 첩 자리를 박차고 기녀라는 천한 신분을 택했고 이를 통해 사대부들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어 양반도 상놈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이러한 황진이의 자유로움과 급진적인 성향은 남·북한 모든 소설가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덕목이었다. 황진이는 학식과 권세를 겸비한 조선사대부들을 희롱하고자 조선 최고의 군자라고 불린 벽계수(본명 충남)를 유혹했다.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감을 자랑마라. 황진이의 격조있는 구애시 앞에 벽계수는 군자로서의 허울을 벗어 던졌다. 종친이라는 신분과 당대 최고의 호인인 벽계수를 무너뜨린 일로 황진이는 유명세를 탔다. 벽계수에 이어 불가의 생불로 통하던 지족선사를 파계시켰고 도학군자로 이름을 날리던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황진이의 일생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일 것이다. 황진이는 당시 도학군자로 이름을 날리던 화담 선생이 진실한 군자인지 거짓 군자인지 밝혀보고자 했다. 모든 남성이 황진이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화담선생만큼은 그녀의 유혹을 뿌리쳤다. 화담선생의 높은 덕망 앞에 황진이는 감복하여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자신과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이라 칭송했다. 이사종과 6년간의 사랑, 소세양과 30일간의 사랑황진이는 사대부의 허울만 벗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여성은 아니었다. 선전관이었던 이사종을 사랑하여 6년간 전국을 유람하였다. 한양 제일의 소리꾼이라는 이사종과 황진이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두 사람은 거칠 것 없이 송도를 떠나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한양과 송악에서 남녀간의 사랑을 초월한 예술 동지이자 영혼의 동반자로 인생을 함께 나눴다. 연인과의 사랑을 바탕으로 시를 지을 때면 조선 최고의 시인이 되었다. 그녀가 이사종과의 열정적인 사랑을 읊은 [동짓날 기나긴 밤]은 오늘날까지도 애송되는 옛시조이다.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이별 없는 사랑이 없다지만, 잦은 이별은 그녀의 마음을 멍들게 했을까. 소세양과의 30일간의 사랑은 참으로 애틋하다. 황진이와 사랑을 나눈 소세양은 중종 4년에 등과하여 시문에 능했고, 벼슬이 대제학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소세양은 젊어서부터 여색을 밝혔다고 전한다. 송도의 명기 황진이가 절세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소세양은 “황진이가 절색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녀와 30일만 함께 하고 깨끗하게 헤어질 것이다. 만약 하루라도 더 머물게 된다면 너희들이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황진이를 만난 소세양은 30일의 약속으로 동거에 들어갔다. 마침내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소세양은 황진이와 함께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황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시 한수를 소세양에게 써주었다. 그녀의 시 한수는 소세양의 마음을 움직였고, 친구들은 약속을 어긴 소세양을 인간이 아니라고 놀렸다 한다. 소세양과의 이별을 맞이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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