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2반

푸르른 하늘 위

맑은 햇살 아래~

우리들 함께 가요

서로 손 잡고~

내가 먼저 배려하는, 예절바른 어린이!
  • 선생님 : 최정빈
  • 학생수 : 남 12명 / 여 13명

김송이 세종대왕

이름 최정빈 등록일 18.04.26 조회수 1

 

세종 때에는 유럽의 르네상스에 비견될 정도로 문화와 과학이 크게 융성했다. 특히 훈민정음의 완성과 반포는 이 시기 문화유산의 결정체이다. 1428년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간행사업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역사서, <사서언해> <효행록> <삼강행실> <오례의주> 등 유교경전, <운회언역>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등 음운 언해 관련 서적, <팔도지리지> <조선전도> 등 지리서,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 의학서가 쏟아져 나왔다. 특히 1443년 완성돼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은 종래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기형적인 문자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과학 유산도 양산됐다. 해시계로는 장영실 등이 발명한 앙부일구(仰釜日晷),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었다. 물시계는 흐린 날이나 밤에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표준시계로 쓰였다. 1398년에 이미 경루(更漏)라는 국내 최초의 물시계가 있었지만, 세종 때에는 장영실이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 등 더욱 발전한 물시계를 만들었다.

1441년 측우기의 발명은 빗물이 땅 속에 스며드는 깊이로 강우량을 측정하던 종래의 불완전한 방법을 개선해 과학적인 강우량 측정을 가능케 했다. 인쇄술도 큰 진전을 이뤄냈다. 태종 때인 1403년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만들어졌으나 글자의 모양과 크기가 매끈하거나 고르지 못한 결점이 있었다.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새로운 금속활자에 관심을 기울였던 세종은 경자자(庚子字), 갑인자(甲寅字), 병진자(丙辰字) 등을 주조하는 데 성공했다.

화포의 주조기술과 화약 제조기술도 단순한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벗어나 천자화포(天字火砲), 지자화포(地字火砲) 등 새로운 화포가 개발됐다. 조선의 제4대 임금이었던 세종은 평생을 괴롭혀온 당뇨병으로 53세 때인 1450년 눈을 감았다. 세종은 자신이 죽으면 아버지가 잠든 헌인릉 주변에 함께 묻히기를 원해 그곳에 능 자리를 정했다. 그러나 왕비 소헌왕후가 먼저 세상을 뜨자 지관들은 “헌인릉 주변은 능묘 자리로 좋지 않다”며 다른 곳에 능묘를 정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러자 세종은 “다른 곳에 복이 깃든 땅을 얻는 게 아버지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며, 소헌왕후의 능을 헌인릉으로 정하고 자신도 죽어 왕후 곁에 나란히 묻혔다.

세종이 사망한 뒤 지관들은 세종의 묘 자리가 좋지 않다고 상소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세종의 능을 옮기려 여러 차례 숙의를 거듭했다. 예종은 세종의 능을 옮길 자리를 알아보라고 지관들을 전국에 내려 보냈다. 묘를 옮길 장소를 알아보던 지관들이 경기 여주의 북성산에 다다르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지관들이 비 피할 곳을 찾다보니 신기하게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재실(무덤이나 사당의 옆에 제사 지내려고 지은 집)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곳은 천하의 명당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종의 능은 여주 능대리 북산 중턱으로 옮기게 됐다. 세종의 능인 영릉은 봉분이 하나뿐이어서 세종만 잠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왕과 왕비가 함께 묻혀 있는 합장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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