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의 문화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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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권해인 | 등록일 | 16.09.19 | 조회수 | 10 |
수원화성(1963년 사적 제3호로 지정,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1. 수원화성의 역사.문화유산적 사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었고,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지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성곽 시설의 기능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으뜸이라 할만합니다. 1].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먼저번 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쌀넣는함)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성을 만들었습니다.
화성을 지을 때는 그 안에 장안문·팔달문·화홍문·장악당, 북동/북서포루, 봉수당·낙남헌·서장대·방화수유정·강무당·북옹성·북포루·남암문·적대·남옹성·만석거·남장대·영화정·창룡문·남공심돈·화서문·남수문·서북공심돈·북암문·동북노대·서포루 등을 갖추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고 허물어져 지금은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습니다. 2. 수원화성의 자랑거리 거중기, 녹로 등 근대 과학적 기구를 축성에 활용하여 그당시 첨단 과학기술의 축적이지요. 정조와 실학자들의 많은 노력들이 한 데 모여서 이룩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정약용의 거중기는 당시에 사용하였던 여러 기계들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기능을 발휘한 것으로, 우리 나라의 과학 기계의 역사에 우뚝 서 있습니다. 그외에도 녹로[일종의 지금의 크레인], 유형거[지금의 수레],대거 동거[수레]등 그당시로선 매우 과학적인 기계들을 활용한 사례입니다. 오늘날에 남아 있는 수원의 화성(수원성)을 보면 이런 규모의 성을 쌓기 위해서는 상당히 과학적인 기술과 기계들의 이용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즉, 이동이 편리하고, 능률적이며, 효율적으로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 기기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만들어 낸 것이 거중기이다. 실학자들은 지게 같은 우리 나라 고유의 각종 기구를 활용하였고, 또한 다른 나라 기술의 장점을 응용하여 거중기 같은 효율적인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오늘날 조선 시대 성곽의 꽃이라 불리는 수원의 화성(수원성)이 탄생하게 된 것은 정조와 실학자들의 많은 노력들이 한 데 모여서 이룩된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정약용의 거중기는 당시에 사용하였던 여러 기계들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기능을 발휘한 것으로, 우리 나라의 과학 기계의 역사에 우뚝 서 있다. 3. 수원화성의 볼거리
1]. [수원화성 팔달문] 2]. [ 수원화성 서북 공심돈] 수원성은 한양의 남쪽성으로 견고하고 중수하게 건설하였으며 사실상 일제시대에 일본군의 원산만상륙시 저지한 적이 있습니다
3]. [화성행궁정문입니다] 4]. 각종 과학기계[녹로/거중기/유형거/윤/축/복토/여] 녹로[ 轆轤 ] ![]() 녹로≪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녹로로 도르래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 쓰이던 기구며, 조선 후기에 성을 쌓거나 큰 집을 지을 때 사용하였다. 거중기 거중기는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도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기계 장치이다. 정약용은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였다. 거중기는 수원 화성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유형거 ![]()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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