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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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보미 | 등록일 | 16.05.31 | 조회수 | 110 |
독도를 지키기 위한 조상님의 노력 먼저 독도에 대하여 알아보자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한 화산섬으로 큰 섬인 동도와 서도 및 89개의 돌섬과 암초들로 구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우산도 삼복도 가지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19세기 후반이후 석도, 독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06년 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독도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 되었다. 독도는 수산자원이 풍부사고 천연 기념물이 살고 지하 자원이 풍부 하다 독도를 지키기 위한 조상님의 노력이다. 신라장군 이사부 6세기초, 이찬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512) 이후 우산국은 신라 뿐 아니 라 고려왕조 이후에도 내륙의 왕조와 조공관계를 맺고 토산물을 바쳐 왔다. 11세기초 동북 여진족의 침략을 받은 뒤부터 우산국은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늦어도 1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섬으로 되어 버린것 같다
이규원 조선시대의 무관. 1882년(고종 19)에 울릉도 검찰사가 되어 울릉도(독도 포함) 를 시찰하고 돌아온 이규원은 천혜의 보고인 울릉도와 독도에 왜인들이 침입, 벌목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땅인 양 입표까지 한 것에 분개하여 일본공사에 항의함은 물론 일본 외무상에 항 의문서를 발송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감동한 고종은 그간의 '공도정책'을 버리고 울릉도 개척에 착수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 재차 항의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의 '공도정책'으로 무인도가 되어 있던 울릉도에 현지 조사를 한 결과 일본 어부들이 출어하여 벌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문책하여 돌려보냈다. 그 후, '이규원 울릉도 검찰일기' 를 조정에 제출하여 이를 통해 조정은 일본에 항의 공문을 보내고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도록 조치했다.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의 3년 동안의 활약상은 전설적인 실화로 전해져 내려온다. 53년 울릉도 출신 전역군인들이 상사 출신인 홍순칠(87년 작고)씨를 대장으로 하여 '우리 시대 마지막 의병' 의 기치를 내걸게 된 것은 일본이 한국전쟁 중 우리 행정력의 공백기를 틈타 독도에 '일본령' 이라는 한자표지를 세웠기 때문이다.
울릉도 주민 '홍순칠'은 울릉도 경찰서장으로부터 지원 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소총 등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울릉도 전역군인들을 이끌고 독도의용 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에 주둔했다. 그 후 일본이 3척의 함대를 이끌고 이 들을 위협했으나 이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홍재현 일가 홍재현은 조선시대 호조참판을 지내다 울릉도에 유배된 조부를 따라 울릉도에 정착했다. 그는 독도에 나타난 왜인들을 물리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고히 밝히고 돌아왔다. 그 후 계속된 일본의 독도 침입은 그의 아들 '홍종욱'이 대를 이어 막아냈으며 손자인 '홍순칠'은 그 유명한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었다. 홍재현 일가는 3 대에 걸쳐 독도를 지켜온 산증인들이었다.
최종덕 1980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오자, " 단 한 명이라도 우리 주민이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울릉읍 도동 산 67번지 서도 벼랑어귀에 주민등록을 옮긴 최종덕씨의 독도사랑 정신은 독도를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는 수중창고를 마련하고 전복수정법, 특수어망을 개발하여 서도 중간 분지에 물골이라 는 샘물을 발굴하는 등 초인적 노력을 쏟으며 살다 1987년 생을 마쳤다.
안용복 조선 때의 민간 외교가. 울릉도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함부로 베어가자, 1693년(숙종 19년)에 울릉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모두 몰아 냈다.
1696년(숙종 2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스스로 울릉도, 우도의 감세관이라 일컫고,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땅임을 주장한 후 그들의 잘못을 엄하게 따져 끝내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이듬해 일본 막부는 쓰시마 도주를 통하여 다시는 일본인이 울릉도와 독도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통지를 공식으로 보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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