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숙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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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정은소 | 등록일 | 16.05.24 | 조회수 | 81 |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세워진 대한민국의 정부를 말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 운동을 계기로 수립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을 달성하고자 '조선이 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선포한 우리 민족 최대 민족운동이었다. 3.1운동이 절정에 이르던 1919년 3월과 4월 국내외에서 8, 9개의 임시정부 수립이 발표되었다. 먼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수립했다. 상항이에서는 4월 10일, 11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개최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국내에서도 13도 대표가 4.23일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국민대회를 개최한 후 '한성정부' 수립을 대내외에 발표했다. 이렇든 연해주와 상하이, 한성정부만이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전단만으로 발표된 정부였다. 이 세 임시정부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주도로 통합을 추진했다. 여러 차레 논의를 거쳐 1919년 9월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인정하고 정부의 위치는 상하이에 둔다는 원칙에 합희한 후,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비롯해 국무위원들을 선출하고 '대한민국 임서정부'로 통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 정부였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천명하고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선포했다. 황제가 주인인 전제군주제나 입헌군주제를 부정하고 민주/민본/민권을 기본 이념으로 삼는 공화주의 정부를 수립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강점기 27년 동안 정부 조직을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가능한 모든 방략을 동원했으며 연통제와 교통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특히 국내에 임시정부 조직망인 연통부를 설치해 연계를 맺어나갔고 교통국을 통해서 독립자금 모집과 전달, 물자와 인원의 수송, 정보 수집과 보고를 수행했다. 임시정부는 군사 활동에 주력했다. 무관학교를 설립해 초급장교를 양성, 서간도 직할 독립군부대를 조직하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만주독립군을 통합하려는 계획도 추진했다. 1932년 1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천황을 저격한 이봉창의 의거, 4월에는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수뇌를 폭사시킨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을 거행했다. 또한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기르는 데 역량을 집중해 1940년 9월에는 임시정부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성했다. 한국광복군은 이후에 영군군과 함께 인도, 미얀마 전선에서 대일항전을 펼쳤으며 미국 첩보기군이 OSS와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외교활동에도 치중했다. 일제의 침략을 국제사회에 폭로하고 독립을 위해 세계 열강의 지원과 협조를 받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에 파리위원부, 미국에 구미위원부 등 외교전담 기구를 설치해 각종 국제회의가 개최될 때마다 대표를 파견해 독립을 보장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과 관련이 깊었다. 임시정부가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대일선전 포고를 하고 미국에 임시정부 승인과 광복군 지원을 요청한 것도 교전국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1943년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논의되고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토록 한다'는 선언이 발표된 것은 임시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한 외교/군사 활동의 결과였다 [출처] 네이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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