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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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수혁 | 등록일 | 17.03.31 | 조회수 | 33 |
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영·정조 시대의 실학을 계승하여 19세기 시대적 격랑에 대처하고자 다방면에 걸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오늘날 그는 단지 실학사상의 계승자뿐만 아니라 개화사상의 선구자,나아가 실학과 개화사상을 연결한 근대의 가교자라 평가받고 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환재 박규수의 초상화 <출처: 실학박물관> 박규수는 1807년 10월 7일(양력) 서울 북부 가회방 재동에서 박종채(朴宗采, 1780~1835)와 전주 유씨 사이에서 3남 중 장자로 태어났다. 18세기 북학파로 유명한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은 박규수의 조부이다. 조부인 박지원은 박규수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805년 6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므로 그가 조부를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연암이 박규수의 학문 전반에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 박규수가 태어나고 오랜 기간 살았던 재동 자택은 박지원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살았던 곳이다. 재동 일대는 오래전부터 북촌이라 하여 노론계 양반들이 집단으로 살았던 지역이다. 연암은 이 지역에 살면서 중국식 벽돌집을 지어 ‘계산초당(桂山草堂)’이라 불렀고 박규수는 조부가 만든 계산초당에서 태어났다. 조부에게 직접 사사받은 적은 없지만, 연암의 학문을 전수한 부친 박종채의 영향으로 박규수의 실학적 학문 세계는 다져진다. 박종채는 장남이 아니었으나 형인 박종의가 일찍 작고하여 형을 대신하였고 부친인 연암의 실학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박규수가 태어나기 전 부친인 박종채는 연암으로부터 옥판(玉板, 관복의 장식품)을 받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당시 박종채 형제는 모두 벼슬을 하지 못한 신세였으며, 대를 이을 후사마저 없는 상태였는데, 이 꿈을 꾼 뒤에 박규수가 태어났고 박규수는 연암을 이어 가문을 빛낼 자손으로서 어려서부터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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