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는 인류가 시작하여 곡물을 주식으로 삼은 후부터 만들어 먹기 시작하였다. 곡물의 구성은 전분이 대부분이어서 에너지원은 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비타민이나 무기질이 풍부한 채소를 함께 섭취해야 한다. 채소는 곡물과는 달리 저장하기 어렵다. 말려서 보관할 수는 있지만 본래의 맛이 없어지고 영양소가 손실되기도 한다. 그래서 채소를 소금에 절이거나 장(醬), 초(醋), 향신료 등과 섞어 두어 새로운 맛과 향이 생기게 하는 저장법을 개발했는데 이것이 김치류이다.
김치가 처음 나오는 문헌은 약 3,000년 전 중국의 『시경』이다. “밭두둑에 외가 열렸다. 외를 깎아 저(菹)를 담자. 이것을 조상에 바쳐 수(壽)를 누리고 하늘의 복을 받자”고 하였는데 ‘저(菹)’가 바로 김치류를 말한다. 실제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말의 『석명(釋名)』이라는 사전에 “저(菹)는 조(阻 : 막힐 조)이므로 채소를 소금에 절여 숙성시키면 유산이 생기는데 이것이 소금과 더불어 채소를 짓무르는 것을 막아준다”고 하였다. 그 이전의 옥편 『설문해자(說問解字)』(기원후 100년경)에서는 “초(醋)에 절인 외가 바로 저(菹)”라 하였으니 김치류는 현재의 피클(pickles)처럼 초에 절이는 방법과 소금에 절여 유산 발효시키는 저장법 두 가지가 있었던 셈이다. 중국의 문헌은 김치류를 한결같이 ‘저’라 하였으나 우리는 ‘지(漬)’라고도 하였다.
고려 시대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외, 가지, 순무, 파, 아욱, 박의 여섯 가지 채소에 대해 읊은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가 있는데 그중에 순무로 장아찌(得醬(득장))를 담는 것과 소금절임(漬鹽(지염))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고려 시대의 김치류에는 지금과는 달리 고춧가루나 젓갈, 육류를 쓰지 않았다. 소금을 뿌린 채소에 천초나 마늘, 생강 등의 향신료만 섞어서 재워 두면 채소에 있는 수분이 빠져 나와 채소 자체가 소금물에 가라 않는 침지(沈漬) 상태가 된다. 이를 보고 ‘침채(沈菜)’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조선 중중 때의 『벽온방(壁瘟方)』에 “싄 무 딤채국(菹汁(저즙))을 집안 사람이 다 먹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저(菹)’를 우리말로 ‘딤채’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국어학자 박갑수는 김치의 어원에 대해, ‘침채’가 ‘팀채’가 되고, 이것이 ‘딤채’로 변하고 구개음화하여 ‘김채’, 다시 ‘김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장은 반식량 [네이버 지식백과] 배추김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음식 백가지 1, 초판 1998., 10쇄 2011., 현암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