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4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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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배려하며 함께 성장하는 우리
  • 선생님 : 김지인
  • 학생수 : 남 12명 / 여 13명

독립운동가 이상설(유성현)

이름 유태욱 등록일 18.05.14 조회수 47

이상설(李相卨

   1870∼1917. 독립운동가. 진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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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와 업적

  충북 진천에는 주인공의 유해가 없는 특이한 묘소가 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로 잘 알려진 이상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상설은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광무황제가 파견한 3인 특사 중 정사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신구학문을 겸비한 대학자였고, 일제하 해외 한인의 독립운동에 기초를 마련한 선구자이다. 위당 정인보는 율곡을 이을 대학자라고 그를 찬양하였고, 여순 감옥에 있던 안중근은 이상설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당대의 한국인이라 하였다.


  이상설은 1870년에 진천군 산직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시골 선비 이행우였고, 모친은 벽진 이씨였다. 이상설은 7세 때 일가인 용우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친가와 양가의 부모는 모두 그의 10대 당시에 세상을 떠났다.


  이상설은 이회영ㆍ이시영 등 당대 재능 있는 청년들을 이끌며 학문을 논하였다. 일찍이 강화학파의 양명학을 수학하였고, 영ㆍ불ㆍ일어와 서양의 신학문도 열심히 익혔다. 그는 수학·물리학·화학·경제학·국제법 등에 밝았고, 한국 최초로 수학교과서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1894년에 실시된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 이후 그의 일생은 국권수호와 독립운동으로 일관되었다.


  일본이 1904년에 한국의 토지를 약탈하려 하자, 이상설은 보안회와 함께 이를 성토하여 저지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될 당시 그는 황제와 대신들에게 ‘차라리 사직을 위해 자결하시라’고 주장하였다. 민영환의 자결은 그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라고도 한다. ‘조약’ 직후 자신도 자결을 기도하다 주위에 의해 가까스로 구출되었다.


  그는 1906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가산을 처분한 자금으로 용정에 한국 최초의 해외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웠다.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이듬해인 1907년 이상설은 이준ㆍ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일본ㆍ러시아의 담합과 열강의 외면으로 만국평화회의장에 입장하지도 못하였다. 이들은 각국 대표에게 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준의 순국 후에도 각국을 순방하며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널리 알려 국제여론을 환기함.


  그 뒤 이상설은 미국과 하와이 한인의 결집과 독립운동을 촉구한 뒤 연해주에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 건설에 착수함.  1910년 유인석ㆍ이범윤 등과 13도의군을 결성하였고,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성명회 선언을 통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의지를 밝혔다.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에 권업회를 조직했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고취하였다.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움, 이듬해에는 상해에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부단한 독립운동 과정에서 그는 심신의 건강을 크게 해치고 말았다. 1917년 3월 러시아의 니콜리스크에서 가족과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화장하여 강에 뿌려졌고, 그의 유품과 기록은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들의 안전을 위해 모두 소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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