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4반

안녕하세요. 여러분! 항상 건강하고 밝은 우리반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배려하며 함께 성장하는 우리
  • 선생님 : 김지인
  • 학생수 : 남 12명 / 여 13명

독립운동가 신채호 (안여진)

이름 안은진 등록일 18.05.13 조회수 52

신채호는 어릴 때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공부했다.

시와 글 솜씨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으며,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 연구에 힘썼다.

하지만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황성 신문》 기자와 《대한 매일 신보》의 논설 위원으로 활동하며 정부의 잘잘못을 가리고 항일 언론 운동을 펼쳤다.

또한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만들었으며, 국채 보상 운동을 벌일 때는 스스로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나라 빚을 갚는 데 보태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루는 신채호가 고개를 든 채 세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다.

“선생님, 그렇게 세수를 하시면 옷이 다 젖습니다.

고개를 숙이셔야지요.”

그러자 신채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절대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이다.

세수할 때조차도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이야.”

그렇게 신채호는 평생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세수를 했다고 한다.

1910년 한일 합병이 되자 신채호는 일제의 억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광복회를 만들고 상하이와 베이징을 넘나들면서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당시 임시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의견을 달리해 임시 정부를 나와 《신대한》을 창간하였다.

그는 여기에 《독립 신문》과 정반대되는 의견을 담으며 임시 정부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역사만이 살 길이다.’라는 생각으로 신채호는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 고대사를 연구했다.

신채호의 역사 연구는 실제 증거를 강조하며 철저한 민족주의 역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광개토왕릉을 비롯해 고구려와 발해의 옛 유적지를 직접 돌아 보았고, 〈조선 상고사〉, 〈조선 상고 문화사〉, 〈조선사 연구초〉 등을 써서 우리 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채호는 독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 안에서 신채호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만약 신채호가 감옥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일본은 신채호를 보호할 사람이 있으면 풀어 주겠다고 알렸다.

며칠 뒤 한 사람이 감옥으로 찾아왔지만 신채호는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친일파의 도움으로 목숨을 잇느니 이대로 죽는 게 낫다.”

결국 신채호는 차가운 감옥에서 혼자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출처:지식백과

이전글 독립운동가 신채호(임소희) (14)
다음글 우리 지역의 역사적 인물 (임경업 장군)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