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훈> 역지사지 [易地思之]
즐겁고 행복한 교실을 만들기 위해
서로 배려하고 존중합시다.^^
최고 반 사랑합니다 ♥
토론※항복을 해서는 않된다.※ |
|||||
---|---|---|---|---|---|
이름 | 송승현 | 등록일 | 17.11.06 | 조회수 | 30 |
왜냐하면 신라가 나라를 항복하고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국적과 자신이 살고 지내왔던 나라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약 1,100년 전의 후삼국 시대에 약소국 신라는 강대국인 고려, 후백제 두 나라의 통일전쟁 틈에 끼여있었다. 그러다가 경주 포석정을 기습한 후백제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견훤에 의해 경순왕이 신라 제56대 왕이 되었다(927).
내정 파탄과 후백제의 압박 등으로 신라는 점점 더 약해져만 갔다. 경순왕은 왕조를 이어 가야 할지 아니면 항복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신하들도 항복에 찬성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나뉘었다. 맏아들은 항복에 결사코 반대하였다. 경순왕은 이곳 왕대에 앉아서 발아래 출렁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시름을 달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순왕의 항복에 반대한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향하고 경순왕은 11월 문무백관을 이끌고 경주에서 개성으로 향했다. 수레와 말이 약 12km나 되는 길에 펼쳐졌고 사람들은 담을 싼 듯 모여서 그 모습을 구경하였다. 먼 길 끝에 도착한 이들은 개성에서 왕건에게 무릎을 끓었다(935).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로부터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천 년 사직(992년간, 56명의 임금) 신라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하기(936) 1년 전이었다. 왕건은 경순왕을 위로하고 특별한 대우를 해 주었다. 항복을 반대하던 맏아들(태자)은 아버지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하직 인사를 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위 밑에 집을 짓고 삼베 옷(麻衣 마의)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 맏아들이 마의태자이다. 경주를 떠난 마의 태자는 문경에서 계립령(하늘재)을 넘어 충주로 들어섰다. 고개를 넘자마자 미륵리에는 5층 석탑(보물 제95호)과 석불(보물 제96호) 등이 있는 절터가 있다.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전설의 석불이 바라보는 월악산 중턱에 여동생인 덕주공주가 덕주사를 세웠고 거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보물 제406호)도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 더 올라간 원주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주포리에는 경순왕이 들렀다고 해서 대왕산이었다가 이름이 바뀐 미륵산, 귀한 분이 오셨다는 뜻의 귀래면(貴來面), 경순왕의 얼굴을 새겼다는 미륵산 정상의 주포리 마애불이 전설로 전해져 온다. 경순왕 전설로 전해 오지만 마의태자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양평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지팡이를 심어서 된 것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은행나무도 있다. 금강산에서 가까운 인제에도 태자가 옥새를 숨겼다는 옥새 바위, 그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수구네미 고개, 군량리, 항병골, 김부리 등의 지명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것처럼 금강산에서 조용히 일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항복에 반대했던 태자는 금강산을 향해 가는 길 곳곳에서 뜻이 맞는 세력을 모아서 신라 부흥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순왕이 새겼다고 전하는 마애불 툭 튀어나온 왕대 바로 옆 암벽에 마애불이 있다. 아침 햇빛에 비친 왕대 그림자가 마애불에 드리워져 있다. 동북향의 마애불은 오전 중에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온종일 그늘이 져 있다. 게다가 선으로 새겨져 있고 마모도 심하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
이전글 | 신라는 항복해야 한다-과제- |
---|---|
다음글 | 토론 (신라는 항복을 해야한다.)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