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申采浩]정의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문인.가계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이다.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열혈생(熱血生), 한놈, 검심(劍心),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 등이다. 조선시대 신숙주(申淑舟)의 18대 손이 된다. 고령신씨(高靈申氏)의 일부는 연산군 무렵에 낭성과 가덕 지방에 낙향하여 살았는데, 상당산성 동쪽에 산다고 하여 산동대가로 지칭되기도 했다.활동사항신채호(申采浩)[1880~1936]의 이름은 청년기까지 한자로 ‘寀浩’로 쓰다가 국외 망명을 전후하여 ‘采浩’로 바꾸었다.
신채호는 어려서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한학 교육을 받았으며, 아홉 살에 『통감(通鑑)』전질을 해독하고 열 살에 행시(行詩)를 지을 만큼 총명하였다. 열두세 살 때에 능히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독파하여 신동이라 불리었다.
열여덟 살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집에 드나들며 책을 두루 읽으며 그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열아홉 살 때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 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이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김연성(金演性), 변영만(卞榮晩), 이장식(李章植), 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에 신채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협회 내무부 문서부에서 활동하였다. 스물두 살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1879~1922] 등과 개화와 자강의 교육사상을 펼쳤고, 스물다섯 살 때에는 신규식, 신백우(申伯雨)[1886~1959]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하여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스물여섯 살 되던 1905년 2월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에 들어가 논설을 쓰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정간되어 퇴사하고 그 이듬해에 신채호는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에 들어가, 그 뒤 주필이 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더불어 그는 1907년 9월에 그는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정치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어 무단통치가 이루어지자 독립운동 기지를 국외로 옮기자는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신채호도 1910년 4월에 망명길에 올라 그 해 여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다. 여기서 그는 윤세복(尹世復), 이동휘, 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해조신문(海潮新聞)』의 후신 『대동공보(大東共報)』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에 그는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고, 문일평(文一平), 박은식(朴殷植), 정인보(鄭寅普), 조소앙(趙素昻)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1914년에는 윤세용(尹世茸), 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 회인현(滿州 奉天城 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朝鮮史)』를 집필 발간했다. 이 때 그는 백두산과 광개토대왕릉을 비롯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며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1916년 3월에는 북경에서 애국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소설 「꿈하늘(夢天)」을 썼다.
1918년경부터 그는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였고,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으며, 이어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에 대립되는 『신대한신문』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그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해 1월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였으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그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거주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그는 아나키즘 사상에도 심취했다.
1927년에 그는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면서 국외에서나마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대회에 참석하여 활동하는 등 그의 행동투쟁은 점점 거세어졌다. 그러다가 그는 그해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 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되었다.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쉰일곱 살에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평소 "내 죽거든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띄워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아무도 모르게 그의 유해를 들여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上黨山)[419m] 기슭 옛 집터에 암장하였다. 이때 만해 한용운이 돌을 깎고, 오세창이 글씨를 새긴 비석을 신백우가 몰래 세웠다. [네ì´ë²„ ì§?ì‹ë°±ê³¼] 신채호 [申采浩]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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