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3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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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3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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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역사조사숙제(4학년3반 이수빈)

이름 이수빈 등록일 16.06.23 조회수 205

청주·청원

무심천에 뜬 배, 돛대로 우뚝 선 무쇠당간

코스 개관

청원군은 충청북도 중서부에 자리잡은 군이다. 한가운데 충청북도 도청 소재지 청주가 있다. 청주는 충청북도 행정·문화의 중심이지만 복닥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정돈된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청주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줄지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청년 같은 푸르름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예로부터 청주를 주성()이라 했다. 청주의 지세가 무심천 위에 뜬 배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청주의 도심인 남문로2가에 서 있는 용두사터 철당간은 그 ‘배’를 안정시키기 위해 세운 돛대라고 전해진다. 고려 광종 때 청주의 호족 김예종이 유행병이 걸리자 이 당간을 용두사에 세워 부처께 바쳤다는 명문이 당간 아래쪽에 또렷하지만, 전설은 전설대로 또 그럴싸하다.

운천동의 흥덕사터와 무심천 가 사직동의 용화사도 청주 시가지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답사처이다. 1984년 택지조성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흥덕사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경』을 찍어낸 그 흥덕사가 있던 곳이다. 절터 옆에 우리나라 인쇄문화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고인쇄박물관이 함께 있다. 용화사에는 주변의 옛 절터들에서 모아들인 고려시대의 불상 일곱 구가 함께 모셔져 있다.

백제의 땅이던 시절 청주는 상당현이라 불렸다. 이어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고 신문왕 5년(685) 서원소경으로 삼았으며 경덕왕 16년(757) 서원경으로 승격시켰다. 고려 태조 23년(940) 청주로 개칭되었고 성종 2년(983)에 청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청주시 동북쪽 가장자리, 상당산 위를 두른 상당산성은 백제에 속하던 시절부터 조선시대까지 청주의 보루 구실을 해왔다.

상당산성 가기 전 용정동으로 빠져나가면 천제당과 산제당, 동구의 돌장승을 모시고 해마다 제를 지내는 이정골에 닿는다. 아이처럼 순진하고 따뜻한 표정을 지닌 이곳 돌장승의 몸통 아래쪽에는 건립일시와 시주자, 화주를 적은 명문이 있다. 상당산 너머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는 한말 사학자이자 언론인, 민족운동가로서 뜨거운 삶을 살았던 단재 신채호가 자란 마을로 그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광천수로 유명한 초정리 부근 비중리에서 6세기 중엽 조성된 일광삼존불상을 만나고 남이면 사동리에서는 딱히 빼어난 데는 없으나 차분하고 안심스러운 절 안심사를 찾는다.

청주·청원 지도

청주·청원

무심천에 뜬 배, 돛대로 우뚝 선 무쇠당간

코스 개관

청원군은 충청북도 중서부에 자리잡은 군이다. 한가운데 충청북도 도청 소재지 청주가 있다. 청주는 충청북도 행정·문화의 중심이지만 복닥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정돈된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청주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줄지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청년 같은 푸르름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예로부터 청주를 주성()이라 했다. 청주의 지세가 무심천 위에 뜬 배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청주의 도심인 남문로2가에 서 있는 용두사터 철당간은 그 ‘배’를 안정시키기 위해 세운 돛대라고 전해진다. 고려 광종 때 청주의 호족 김예종이 유행병이 걸리자 이 당간을 용두사에 세워 부처께 바쳤다는 명문이 당간 아래쪽에 또렷하지만, 전설은 전설대로 또 그럴싸하다.

운천동의 흥덕사터와 무심천 가 사직동의 용화사도 청주 시가지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답사처이다. 1984년 택지조성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흥덕사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경』을 찍어낸 그 흥덕사가 있던 곳이다. 절터 옆에 우리나라 인쇄문화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고인쇄박물관이 함께 있다. 용화사에는 주변의 옛 절터들에서 모아들인 고려시대의 불상 일곱 구가 함께 모셔져 있다.

백제의 땅이던 시절 청주는 상당현이라 불렸다. 이어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고 신문왕 5년(685) 서원소경으로 삼았으며 경덕왕 16년(757) 서원경으로 승격시켰다. 고려 태조 23년(940) 청주로 개칭되었고 성종 2년(983)에 청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청주시 동북쪽 가장자리, 상당산 위를 두른 상당산성은 백제에 속하던 시절부터 조선시대까지 청주의 보루 구실을 해왔다.

상당산성 가기 전 용정동으로 빠져나가면 천제당과 산제당, 동구의 돌장승을 모시고 해마다 제를 지내는 이정골에 닿는다. 아이처럼 순진하고 따뜻한 표정을 지닌 이곳 돌장승의 몸통 아래쪽에는 건립일시와 시주자, 화주를 적은 명문이 있다. 상당산 너머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는 한말 사학자이자 언론인, 민족운동가로서 뜨거운 삶을 살았던 단재 신채호가 자란 마을로 그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광천수로 유명한 초정리 부근 비중리에서 6세기 중엽 조성된 일광삼존불상을 만나고 남이면 사동리에서는 딱히 빼어난 데는 없으나 차분하고 안심스러운 절 안심사를 찾는다.

청주·청원 지도
종 목  기념물 
제5호
명 칭청주 압각수 (淸州 鴨脚樹)
분 류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생물과학기념물/ 생물상
수량/면적1주
지정(등록)일1976.12.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6번지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청주시
상 세 문 의   

청주 압각수에 대한 설명입니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압각수는 나이가 9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로 높이가 30m, 둘레가 8m이다. 압각수란 이름은 잎의 모양이 오리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생겼다는 주장과 나무 뿌리가 물오리발처럼 발가락 사이가 붙어있어 생겼다는 주장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목은 이색을 비롯한 어진 신하 10여 명이 모함으로 청주 감옥에 갇혔다가 큰 홍수를 만났을 때 압각수에 올라가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이들의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한 것이라 하여 석방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압각수는 이색 등과 관련된 일화를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나무이며,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아온 나무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압각수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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