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3반

꿈을 밀고나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라 희망이며. 두뇌가 아니라 심장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함께 해서 즐거운 우리, 기쁨으로 여는 행복한 세상
  • 선생님 : 박선영
  • 학생수 : 남 13명 / 여 9명

박수근 화백

이름 박준 등록일 17.04.25 조회수 20
답변

박수근 화백의 일생, 작품, 성격 등등 
박수근 [朴壽根 , 1914.2.2~1965.5.6 ]1914년 강원도 양구(楊口) 출생에서 출생하였다.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화단에 등장하였다. 
8·15광복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하고 미협전에서도 입상했다. 1958년 이후 미국 월드하우스화랑, 조선일보사 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 국내외 미술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1959년 제8회 국전에서는 추천작가, 1962년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을 지냈다. 
작품경향은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나 한국적 주제를 서민적 감각으로 다룬 점이 특색이다. 대표작에 《소녀》 《산》 《강변》 등이 있다.

태어났을 당시 넉넉했던 집안 형편은 그가 보통학교에 들어갈 즈음 어려워졌고 그 이후로는 계속 가난으로 인한 고단한 삶을 살았다.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화가가 되고자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계속하여 18세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로 입선을 하게 되었고 이후 거듭 선전에서 입선하였다. 화가로서 그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6·25동란 후 박수근은 한동안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 대가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후 국전에 수 차례 입선과 특선을 하였고 이 때부터 가난한 이웃을 소재로 하여 평면적이고 독특한 마티에르(질감)를 가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나갔고 화가로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57년 심혈을 기울여 그린 대작 <세 여인>이 국전에서 낙선한 것에 크게 낙심한 나머지 과음을 계속하여 백내장으로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고 간경화도 심해졌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계속 작업을 해갔으나 건강이 더욱 나빠져 1965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이것은 박수근 자신의 철학과 그림에 대한 생각이 담긴 유일한 말로 여기에서 그의 작품의 주제와 특징의 근간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박한 우리네 서민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일하고 있는 여인이나 장터의 풍경, 할아버지와 손자 등 생각만으로도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그들을 박수근은 그리고자 하였다.
그들의 '선함과 진실함'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화강암의 거친 질감을 화폭에 옮겨왔고 그 위에 공간감을 무시하고 극히 단순한 형태와 선묘를 이용한 평면화된 대상을 모노톤의 색채로 그려내어 마치 바위에 각인된 듯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된 그의 작품에서는 숭고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박수근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서구예술을 접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불리한 상황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속 실력을 쌓아간 것이 오히려 그 자신만의 시각과 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가장 한국적인 화가가 된 것이다.

박수근 작가연보 (1914~1965)

1914 2월 21일(음력 1월 28일)강원도 양구군 양구면(지금은 읍(邑)) 정림리 박형지와 윤복주의 삼대 독자로 태어남.
집안은 농사를 짓고 상업을 하여 다소 부유하였으며 기독교를 믿었고, 위로 누나가 셋 있었음.
1916(2세)동생 동근이 태어남.
1918(4세)셋째 동생 원근이 태어남.
1921(7세)아버지가 광산 사업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봄.
여름에는 홍수로 전답 농사도 실패하여 집안형편이 급속히 곤궁해짐.
그 후 아버지는 양잠 지도원으로 말단 봉급생활을 하며 재기의 노력을 했으나 무산됨.
양구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도화(미술)시간에 타고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함.
1926(12세) 
그림 재주가 뛰어나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각별한 귀여움을 받음.
이 무렵, 프랑스의 농민화가 밀레의 '만종(晩鐘)'을 원색 도판으로 처음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음. 
그후 그림에 더욱 열중했으며,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며 늘 기도했다고 함.
1927(13세) 
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함. 
집안이 빈곤하여 중학교 진학을 못하게 되자 화가의 꿈도 좌절에 직면함. 
그러나 화가의 길에 대해 절실한 소망과 그의 재능을 애석하게 여긴 교장선생님의 격려로 독학의 결심을 굳힘. 
이후 날마다 가까운 산과 들로 다니며 연필스케치와 수채화 훈련을 쌓았고, 농가에서 일하는 여인과 들에서 나물 캐는 소녀를 그리기도 함.
1932(18세) 
독학의 시골 미술학도로서 전부터 목표로 삼았던 서울의 [조선미술전람회(鮮展)] 서양화부에 이른 봄의 농가를 그린 수채화<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하자 크게 용기를 얻음. 
그러나 다음 해(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낙선을 함.
1935(21세)유방암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슬픔에 잠김.이후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워져 아버지는 늘어난 빚 때문에 얼마 안되는 재산을 정리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홀로 춘천으로 가서 최악의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 그림에 정진함.

1936(22세) 
제15회 [선전]에 <일하는 여인>이라는 수채화를 출품하여 두 번째 입선함.춘천에서 포천등지로 자립의 길을 찾아 떠돌며 그림을 그리던 시기로, 이해의 출품지는 경기도로 되어 있음.
1937(23세) 
제16회 [선전]에 나물캐는 소녀들을 스케치한 수채화 <봄>이 세 번째로 입선함. 
이 해의 출품지는 서울로 되어있음.
1938(24세) 
제17회 [선전]에서 어렵게 구입한 유채로 처음 그린 <농가의 여인>이 입선함.이 해의 출품지도 서울로 되어 있으며, 이 무렵 상경하여 미술에 대한 견문을 넓히던 시기로 보임.
1939(25세) 
제18회 [선전]에 유채로 그린 <여일(麗日)>이 입선함.
제11회 전람회때 입선했던 수채화로 그린 <봄이 오다>를 유화로 다시 그린 것으로, 그의 유화 독학과정을 엿보여 줌.가을에 거처를 서울에서 춘천으로 옮긴 후, 아버지가 재혼하여 동생들과 살고 있던 금성에 갔다가 춘천에서 여학교를 나온 이웃집의 17세 처녀 김복순을 사랑하게 됨.

1940(26세) 
2월 10일, 금성 감리교회에서 김복순과 결혼식을 올림.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금성에서 새 가정을 꾸밈.5월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의 서기로 취직이 되어 평양으로 떠남.
1941(27세) 
동생 동근이 병으로 사망함.9월에 평양으로 신부를 데려옴. 
셋방에 박봉살림이었으나 행복한 신혼을 보냈으며, 휴일과 퇴근 후에는 제작에 열중하며 [조선미술전람회]연속 입선화가로서 기량을 계속 다짐.
제 20회 [선전]에 <맷돌질하는 여인>이 입선함.이 해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남.

1942(28세) 봄에 첫아들 성소(成沼)를 낳음.
제 21회 [선전]에서 사랑스런 첫아들을 안은 아내를 모델로 그린 <모자(母子)>가 입선함.

1943(29세) 
제 22회 [선전]에서 역시 아내를 모델로 하여 그린 <실을 뽑는 여인>이 입선함.

1944(30세)첫 딸 인숙(仁淑)을 낳음.미군의 폭격이 평양에도 미치게 되자 부녀자와 노약자의 소개령이 내 아내를 어린 남매와 함께 금성 본가로 보냄.
1945(31세) 평양에서 혼자 남아있다가 8.15 해방을 맞이함.
11월에 평안남도 도청 서기직을 그만두고 처자가 있는 금성으로 돌아와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교직생활을 하게 됨.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자유사상을 지닌 화가로 공산 체제의 감시를 받고 문초도 당함.

1947(33세)차남 성남(成男 뒤에 城男으로 씀)이 태어남.

1948(34세)큰아들 성소가 뇌염으로 죽음.
1949(35세)3남 성인(成仁)이 태어남.
1950(36세) 6.25 전쟁이 일어남. 
신변에 위험을 느껴 금성에서 몇 십리 떨어진 시골로 가족이 함께 피함. 
몇 번 체포고비를 넘기다가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으로 자유를 얻음. 
그러나 연말의 중공군 참전과 유엔군의 후퇴로 또다시 위협을 느끼고 시골로 피하던 도중 인민군 추격으로 가족과 헤어져 홀로 남하를 결행함.
3남 성인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죽음.

1951(37세) 
군산까지 내려가 부두노동으로 생활하면서 자유로워진 몸으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함.

1952(38세) 
10월. 공산치하로 되돌아간 금성에 남아 숨어 지내던 아내가 어린 남매 인숙, 성남이를 데리고 남하에 성공함. 
이 무렵, 박수근은 서울 창신동의 큰 처남 (김영주, 6.25 전에 월남) 집에 가있으면서 처자의 남하 여부를 매일 수소문하던 중 그곳으로 찾아온 아내와 극적으로 상봉함
가족과의 새로운 생계를 꾸리기 위해 혜화동에서 화가 이상우가 운영하던 화방의 주선으로 싼값으로라도 그림을 팔려고 다님.

1953(39세) 
이상우의 소개로 미군 CID(범죄수사대)에 그림 그리는 일자리를 얻어 다녔으며, 또한 미 8군 PX(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물)에서 훨씬 수입이 좋은 초상화를 그렸으며, 여기서 모은 35만 환으로 창신동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마련하고, 작은 마루를 제작 공간으로 삼아 창작에 열중함.

전쟁으로 중단됐다가 이 해 가을에 속개된 제2회 [대한민국 미술전(國展)] 
서양화부에 남한에서의 첫 출품한 <집>이 특선으로 선정되고 각광을 받았으며, 
<노상에서>가 입선하였음. 
이때부터 박수근의 수법은 독특하게 단순화시킨 소박한 주제 전개와 굵고 명확한 검은 선의 윤곽과 흰색, 회갈색, 황갈색 주조의 평면적 색체에 명암과 원근감이 거의 배제된 특질적인 표현을 보이기 시작함.
이 해에 막내아들 성민(成民)이 태어남.미술관련 신문기사들을 모아 스크랩을 
시작하여 1965년 타계할 때까지 계속함.

1954(40세) 
제 3회 [국전]에서 <풍경>, <절구>가 입선함.
6.25 발발 4주년 기념 대한미협전에 회원으로 <산>, <길가 에서>를 출품함.
미군 PX에서 호구지책으로 그리던 초상화 제작을 그만두고 자신의 작품에만 전념하여 극심한 생활고를 이겨나감.
[재경(在京)미술가작품전]에 출품. 참가작가는 변영근, 이수억, 조병현 외 다수.

1955(41세) 
제 4회 [국전]에서 <오후>가 입선함.
제 7회 [대한미협전]에 <두 여인>(국회문공위원장상 수상), 
<노상>, <풍경>을 출품함.

1956(42세) 
제 5회 [국전]에서 <나무>가 입선함.

제 8회 [대한미협전]에 <노상>, <풍경>을 출품함. 
반도호텔(지금의 롯대호텔 자리) 안에 생긴 반도화랑을 매개로 주로 외국인 미술애호가들에게 가장 한국적인 소재와 정감 및 특이한 조형수법의 화가로 평가되어 소품이 적지않게 팔리게 됨.
이 해에 둘째 딸 인애(仁愛)가 태어남(1967년 병으로 죽음)

1957(43세)빈곤한 생활 속에서도 제 6회 [국전]을 위해 1백호 크기의 대작 
<세 여인>을 고심해서 제작하여 출품하였으나 낙선되자 충격과 비탄에 빠짐. 
이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지 않던 음주가 심해짐. 
그러나 이 무렵의 작품세계는 더욱 확실해진 표현적 특질과, 가난과 서민 생활에 사랑의 눈길을 집중시키는 주제의 일관성 및 독특한 조형성으로 성숙된 예술적 경기를 반영하고 있음.

1958(44세) 
반도화랑의 창설과 운영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화상 겸 수집가인 미국여성 실리아 짐머맨(Celia Zimmerman)의 콜렉션으로 들어갔던 <노변의 행상>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네스코 미국위원회 기획의 [동서미술전]에 출품됨. 
이때의 다른 한국인 출품작은 김영기의 <설일(雪日)>과 성제휴의 <어촌(漁村)>이 있었음.
뉴욕의 월드 하우스 갤러리에서 개최된 [한국현대회화전]에 <모자(母子)>, 
<노상>, <풍경>을 출품함. 
지난해(1957년)의 낙선으로 [국전]의 출품을 포기함.

1959(45세) 
국전 운영 부서로부터 추천 작가 결정을 통고받고 이 해의 제 8회전에 
<한일(閑日)>과 <좌녀(坐女)>를 출품함.
조선일보사 주최 제 3회 현대작가 초대미전에 <봄>, <휴녀(休女)>, 
<노인과 유동(遊童)>을 출품함.
1960(46세) 4.19 학생의거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섬. 
제 9회 [국전]에 추천 작가로 <노상의 소녀들>을 출품함.
1961(47세) 5.16 군사혁명이 일어남.
제 10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노인>을 출품함.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국제자유미술전]에 <나무>를 출품함.

1962(48세) 
제 11회 [국전]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고, <소와 유동(遊童)> 
(호암미술관 소장)을 출품함.
오산에 있던 주한미공군사령부(USAFK) 도서관에서 [박수근 특별초대전] 마련.
마닐라 [한국현대미술전]에 초대 출품함.
김흥수씨 화집 출판(유네스코 출판부)에 대해 "[디럭스]화집, 완전한 예술의 재현 - 김흥수씨의 역작들"이라는 '신간소개' 글을 신문에 기고함.
이 무렵 그의 예술적 위치와 평가는 날로 높아지고, 화강암질의 기법과 표현적 내면성도 절정에 달했으나, 생활은 그의 작품 속의 인물들처럼 변함없이 빈곤했음.

1963(49세) 
제 12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악(樂)>을 출품함.
과음이 계속되던 끝에 신장과 간이 나빠지고, 그로 인한 발병했던 왼쪽 눈의 백내장을 수술 비용이 없어 악화된 뒤에야 한 안과병원에서 수술을 함. 
그러나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 더욱 고통을 받다가 다른 병원에서의 재수술 과정에서 시신경이 끊어져 한 눈을 아주 못 보게 됨. 
이후 안경을 끼게 되고 오른쪽 눈만으로 그림을 그리게 됨.
9월 집이 가집행철거소송에 제기되어 재판을 통하여 지상권을 따 내었으나 창신동에서 전농동 77번지 23통 5반으로 이사함.
밀러 부인이 다음해인 1964년에 로스엔젤레스에서의 개인전을 제의하고 미국에 있는 그의 작품 수집가들과 연락을 취하였으나 열지 못함.

1964(50세) 
지병이던 간이 갈수록 더 나빠지면서 심한 고통이 따랐으나 음주와 제작 생활을 강행함.
가을의 제 13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할아버지와 손자>(국립현대미술관 소장)를 출품함.

1965(51세)간경화와 응혈증이 크게 악화되어 4월초에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함. 
그러나 회복이 어렵게 되자 5월 5일 퇴원.
집에서 6일 새벽 새벽 1시에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생애를 마침.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안장함.
가을의 14회 [국전]에 미망인이 마지막으로 유작 <유동(遊童)>을 전시케 함.
10월 6일 - 10일.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의 유작전에 79점의 작품이 전시됨.

1970 9월 18일 - 22일. 현대화랑에서 유작 소품전을 열음. 
수채화 및 연필데셍 2백 여점과 유화 약 20점이 출품됨.
1974 백록화랑에서 유작 판화전을 개최함.
1975 문헌화랑에서 박수근 10주기 기념전을 열고 카탈로그를 간행함.
1978 문화화랑에서 박수근 유작전을 열고 화집을 간행함. 
5월 5일.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묘화비(墓畵碑)를 세움. 
묘화비에는 박수근이 즐겨 그린 아이업은 여인네의 소박한 모습이 약 15배로 확대, 음각되어있음.
1979 9월 30일. 중곡동 장로교회 전도사로 헌신하던 미망인 김복순 여사도 뇌졸중으로 작고함. 향년 57세.
1980 월 20일. 정부에서 고 박수근화백에게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함.
1985 11월 8일 - 17일. 우정미술관개관기념 서양화 10인전에 초대 출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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