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1반

안녕하세요. 여러분!

"웃는 얼굴 ,열린 생각, 따뜻한 가슴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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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배움터 3학년 1반 최고~!
  • 선생님 : 안정현
  • 학생수 : 남 10명 / 여 7명

학습모둠 김덕숭 조사

이름 김윤 등록일 16.09.26 조회수 26

김덕숭

공의 호는 모암으로 1373년에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에서 탄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할 때에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글이 나오면 몇 번이든지 되풀이하여 읽었으며, 특히 효경을 좋아하였다.

1401년에 목천 현감으로 있을 때 군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기 모두 편안하게 지냈다. 1404년에 부모 봉양을 하기 위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집으로 와서 있었다. 1403년에 사헌부 집의의 벼슬을 하였으며 1419년에 온양 군수 1426년에 한산군수로 나갔다. 1427년에 공의 나이가 55세였고, 아버지는 78세, 어머니는 77세였다. 벼슬길에 있었기에 부모 봉양을 하기 위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꿩고기, 어머니는 물고기를 좋아하셨기에 날마다 산에 가서 사냥을 하고 냇가에 나가서 고기잡이로 재미를 삼았다.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마음에서이다. 언제나 부모 생일이 되면 이웃에 있는 노인을 청하고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장수하기를 빌면서 술잔을 올리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부러워 하였다. 근동네 사는 사람들 중에서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들 공의 덕을 본받아서 이름 높은 학자도 있었고, 한문의 깊은 뜻을 깨우친 사람도 90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1421년에 공의 나이 59세였다. 어머니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물고기 생각이 난다고 했다. 때는 엄동설한 추운 때였다. 여계소로 나가서 보니 얼음이 얼어서 도저히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얼음 위에 굻어 앉아서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무릎이 있는 곳부터 얼음이 녹기 시작하더니 조그마한 굴이 생겼다. 즉시 도끼로 쳐서 굴을 크게 만들었다. 다시 기도를 올렸다. 얼마 뒤에 갑자기 잉어 두 마리가 튀어 나왔다. 매우 기뻐하면서 잉어를 들고 집에 와서 어머니께 끓여 드리었다. 또한 어느날 한 약구에 가서 약을 지으려 하니 약재료 3가지가 없다는 것이다. 시골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 하고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약장수가 이에 감동하여 달려 왔다. 그는 한약방에 가지고 가서 약을 지은 뒤에 다려 드리어 어머니 병을 치료해 드렸다.

1434년 갑인 12월에 어머니가 작고하셨다. 정성껏 장례를 마친 뒤에 여막을 짓고 여묘를 살았다. 산소는 집에서 1km 정도 떨어져 아침 저녁으로 산소에 나가서 슬프게 곡을 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슬프게 하였다. 여묘를 사는 동안에도 아침 저녁으로 집에 와서 아버지께 문안을 드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른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걸어 다니기가 어려울 터이니 말을 타고 다니라고 권하였지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걸어서 다니었다. 참으로 놀라운 정성이었다. 여묘를 살던 첫날밤에 범 두 마리가 와서 여막의 좌우에 앉아 지켜 주었는데, 낮에는 다른 곳으로 가고, 밤에는 와서 여막의 근방을 두루 살피었다. 3년상이 끝난 뒤에 가 버렸다고 한다. 동물까지도 공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다.

1436년 병진에 3년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부터 아버지 옆을 조금도 떠나지 아니하고 봉양에 정성을 다 하였다. 1437년에 장모 정씨를 모시고 왔는데 친어머니를 봉양한듯 하였다. 군내 유림들이 모두 감탄하였으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세종 26년 1444년 72세때에 아버지는 95세였다. 세종임금께서 초정으로 오시게 되었다. 거기서 공의 효행이 지극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술20병, 말린 청어 50드름, 말린 돼지고기, 말린 노루고기 4마리, 말린 꿩고기30마리를 부모 봉양에 쓰라고 내리었다. 또 감사에게 명령하여 쌀 20가마를 보내라고 하였다. 하사품을 받은 공은 아버지를 모시고 행재소로 갔다. 그 곳에서 임금을 뵈었는데 부자분이 모두 머리가 백발이기에 누가 아버지인지 아들인지 분별할구가 없어서 임금이 직접 물으시었다. 공은 즉시 이 어른이 아버지라고 아뢰자 모두들 놀래었다. 그 때 임금은 즉시 옷 한 벌씩을 하사하였다.

같은 해 7월에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어머니 산소에 합장한 뒤에 여막을 짓고 여묘를 살았다. 잘 때에 요 이불을 덮지 아니하고, 밥을 금하고 죽만 들으며 초석 위에서 거처를 하기에 몸은 파리하고 곡을 할 때에 흘린 눈물은 하얀 수염에 묻어서 마르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초석위에서 자고 죽만 먹는 것은 장정도 어려운 일인데 70세가 넘어 몸이 쇠하였으니 자손에게 시키도록 하여달라고 하였지마는 듣지 않았다. 공은 그 말을 듣고 울면서 말하기를 아버지를 땅에 모시고 자식된 도리에 어떻게 집에 가서 편안하게 지낼 수가 있겠는가 이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으며, 나이도 70세가 넘었으니 산소 옆에서 살다가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였다. 새벽이 되면 일찍 일어나서 상옷을 입고 산소에 나가서 곡을 하였으며 해가 넘어가면 등불을 켜놓은 뒤에 밤이 새도록 끄지 않았다. 1446년 74세에 3년간 여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주를 모신 뒤에 아침 저녁으로 문안들 드렸고 초하루, 보름 날을 제사를 지내고 한식이나 칠석과 같은 명절에는 반드시 시식을 올렸다.

1448년 무진76새 4월에 감환으로 정침에서 고종하였다. 겨울에 진천 판사 송 기등 95인이 연명하여 현에 글을 내고 감사에게 보고하고 다시 조정에 글을 올리어 정려표묘의 은전을 입었다 자상한 이야기는 삼강행실도에 기록되어 있다. 또 임금이 직접 시를 지어서 내리었으니 "부모 봉야에 마음을 두었기에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서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에 평생을 바치었도다. 어머니 산소 옆에서 여묘를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전을 드리고 나면 아버지께 와서 문안을 드리었도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로다." 하였다. 또 한 수의 글뜻은 "아버지를 땅속에 장사 지냈으미 어떻게 집에 와서 있을 수가 있으리오. 70세가 넘어서 아버지 상을 당하였지마는 3년간 여묘를 살았도다. 평생을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니 묘소앞에 세운 비 정려문은 빛나기도 하여라." 라고 하였다. 대왕까지도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마지 않는 글이다. 이렇게 시를 지어서 지극한 효성을 칭송하였고, 특히 증직으로 이조참의를 내리었다. 이 사실을 중국 천자에게 글을 내었더니 천하대효라고 하여 유서를 내리었다.

1568년 무진에 평천부원군 신 잡과 회헌 이 정영이 임금에게 상소하여 이월면 보현산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다시 상소를 하여 윤혀를 받은 후에 백원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참고 : 진천군지, 강능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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