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김대식)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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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유담 | 등록일 | 18.04.09 | 조회수 | 13 |
안용복(1658~????) 안용복의 인적 사항은 그 이름을 빼면 정확한 것이 드물다. 우선 가장 기초적인 생몰년부터 확정하기 어렵다. 사망한 해는 전혀 알 수 없지만, 태어난 해는 1658년,1652년의 두 학설이 제시되고 있다. 안용복 [安龍福] - 희생과 고난으로 독도를 지킨 조선의 백성 일본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는 사실로 볼 때 그는 일본어를 일정 수준 이상 구사했을 것, 제1차 도일(1693년 3월~12월) 안용복의 제1차 도일은 1693년 3월에 일어났다. 그때 안용복은 울산 출신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호키주 요나코무라에서 온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고, 조업권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인원 부족으로 안용복은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박어둔은 안용복보다 8세 아래로, 역시 정확한 신상은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처지의 인물로 추정됨. 제2차 도일(1696년 5월~8월) 제2차 도일은 안용복의 자발적인 결행이었다. 1696년 1월 막부는 울릉도ㆍ독도의 조선 영속과 일본 어민의 도해ㆍ어업을 금지하기로 결정했지만, 대마도가 서계 접수를 미루는 바람에 시행이 계속 늦춰지고 있었다. 그러자 안용복은 자신이 이 문제를 선제적으로 직접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관리로 자칭해 도일하는 대담한 계획을 실행했다. 그의 준비는 치밀했다. 그는 울릉도ㆍ독도가 강원도에 소속된 것으로 그려진 조선팔도지도와 자신이 입을 푸른 철릭, 검은 갓, 가죽신 등 증빙 자료와 물품을 마련했다. 1696년 3월 안용복은 조선 어민을 대거 이끌고 울릉도로 갔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안용복의 계획은 그러나 난관에 부딪쳤다. 그동안 조선과의 대일 통교를 담당해온 대마도가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막부의 연락으로 안용복의 입국과 직소 사실을 알게 된 대마도는, 안용복이 조선의 관원이 아니더라도, 그동안의 관례와는 달리 자신을 거치지 않고 막부와 직접 접촉하도록 허락한 조선 조정의 의도를 의심했다. 대마도에서는 안용복의 고소장을 물리치도록 막부에 요청하고 그 일행을 표착민으로 처리해 자신들을 거쳐 송환하도록 요청했다. 그 결과 안용복 일행은 목표했던 울릉도ㆍ독도의 조선 영속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696년 8월에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이번에도 안용복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안용복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우리나라 국토를 다시 찾아주었다. 이 대단한 인물이 역사에 남겨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4697&cid=59015&categoryId=59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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