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10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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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은 여덟 살 때 신명학교에 들어간다. 해경은 도화(圖畵)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해경의 그림 소질은 화가 고희동이 미술 교사로 있던 보성고보에 다니면서 꽃을 피우게 된다.

이름 전원식 등록일 17.05.19 조회수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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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은 여덟 살 때 신명학교에 들어간다. 해경은 도화(圖畵)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해경의 그림 소질은 화가 고희동이 미술 교사로 있던 보성고보에 다니면서 꽃을 피우게 된다.

보성은 도상봉, 이종우, 장발, 고유섭 같은 화가들을 배출한 학교다. 보성의 미술 친화적 환경 덕분에 그의 재능은 이윽고 빛을 보게 된다. 보성고보 교내 미술 전람회에서 풍경으로 1등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몇 해 뒤 해경은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자화상을 내놓아 입선하기도 한다.

 

의탁하고 있던 백부의 가세마저 기울자 해경은 학교에서 현미빵을 팔며 고학을 한다. 보성고보를 졸업한 그는 진로 문제로 고민에 빠진다. 그가 식민지 건축 기술자 양성을 위해 세워진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의 전신)에 들어간 것은 백부의 소망 때문이다. 백부는 그를 설득한다. “해경아, 앞으로 너는 건축과를 가야 한다. 나도 병들고 네 아비도 늙고 가난하지 않으냐. 적선동(해경의 친가)은 식량이 떨어질 때도 많은 모양이더라. 세태가 아무리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는 곯지 않는단다. 그러니 가난한 환쟁이는 안 돼.” 이상이 오감도, 삼차각 설계도, 건축 무한 육면각체등 건축과 깊은 관련을 지닌 표제어를 자주 쓰고, 아라비아 숫자와 기하학 기호 등을 시어로 차용하고 수식(數式)보다 난해한 시들을 쓰게 된 것은 바로 이 고등공업 시절의 영향이다.

 

이상은 일본인 학생들을 제치고 건축과를 수석 졸업했으며, 졸업 작품으로 수상 경찰서 겸 소방서 설계안을 냈고, 폐병이 깊어지며 현장 근무가 힘들어진 1933년 말까지 조선총독부의 직원으로서 공사를 직접 감독·지휘한다. 그러나 이상이 지은 건물이나 설계도면은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건축은 분명히 그의 삶을 떠받친 한쪽 기반이며, 그의 문학의 촉매 인자이자 발생론적 근거이다.

 

이상의 내면에서 현실 도피나 자살을 추구하는 병적인 심리가 고등공업 시절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런 부분은 건축이나 그림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표출되기 시작한다. 이 무렵의 소설 1212, 휴업과 사정과 시 선에 관한 각서등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상의 이와 같은 이상 심리가 드러난다. 특히 이상의 작품치고는 기법 면에서 평이하지만, 운명처럼 허무주의 늪에 빠지는 인간형을 그려낸 소설 1212의 서문에서, 그는 몹시 강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런 충동을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할 것이라는 무서운 기록을 남기게 된다.

 

19293월 경성고공 졸업과 함께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로 들어간 해경은 같은 해 12월 건축학지인 조선과 건축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뽑힌다. 바로 이 조선과 건축19317월호에 이상한 가역 반응등을 발표한 것이다. 해경이 이상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김해경이라는 오빠의 이름이 이상으로 바뀐 것은 1932년부터예요. 건축 공사장 노동자들이 이상이라고 잘못 호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지요.” 누이동생 김옥희의 말이다. 이상이라는 이름은 총독부 건축 기사 시절 공사장 노동자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긴상(金樣)’이라고 해야 할 것을 이상(李樣)’이라고 잘못 부른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1933년 이상은 백부의 양자로 들어간 지 23년 만에 가족과 합치게 되나 불과 보름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백부의 유산으로 청진동 조선광무소 건물 1층을 전세 내어 제비다방을 개업하고, 백천 온천 여행 중에 만난 술집 여급 출신 금홍을 불러들여 마담으로 앉힌다. 아울러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는데, 이때 금홍은 겨우 스물한 살이었고, 금홍의 눈에 마흔이 넘은 것으로 비치던 이상은 알고 보면 스물세 살이었다. 이상은 어느 글에서 나는 추호의 틀림없는 만 2511개월의 홍안 미소년(紅顔美少年)이다. 그렇건만 나는 노옹(老翁)이다.”라고 쓴다. 찰나적인 행복감에 젖은 이상은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금홍이와 나는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과거라야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의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없다.”고도 쓴다. ‘제비는 당대의 일급 문인이던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정인택, 윤태영, 조용만 등이 즐겨 찾는다.

 

그러나 제비다방의 경영은 여의치 않았고, 금홍은 외간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곤 한다. 이상은 나는 금홍이의 오락을 도우려고 가끔 P군의 집에 가 잤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여기서 ‘P은 아마도 박태원을 이를 터. 금홍의 문란한 남자관계를 방임하던 이상은 때로 금홍의 난폭한 손찌검에 몸을 내맡긴 채 자학을 꾀한다. 어느 날 금홍이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 팽개쳐놓고 나가버리고, ‘제비다방은 두 해 만인 19359월 문을 닫는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는 연애까지 유쾌하오.”로 시작되는 소설 날개는 바로 금홍과의 동거 체험에서 건져낸 작품이다.

 

1933년 그는 <조선중앙일보>에 시 오감도를 발표해 물의를 일으키며 문제 작가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에도 파격적인 내용과 언어를 실험하는 작품을 잇달아 내놓는다.

 

이상은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여느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파행적 단면을 보인다. 처음에는 다방 제비의 얼굴마담으로 금홍을 앉혀놓고, 문우들이 일명 도스토옙스키의 방이라고 하던, ‘제비에 딸린 골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거나 수염과 머리도 깎지 않은 채 거리를 쏘다니더니, 나중에는 드러내놓고 매춘을 하는 금홍을 멀거니 지켜보기도 한다. 이처럼 피학성을 띤 극도의 자기 폐쇄성은 날개, 실화, 봉별기(逢別記)등에서 거푸 나타난다.

 

특히 일인칭 독백으로 시작되는 날개속의 는 바로 작가 이상 자신으로, 철저하게 고립된 자아와 내면의 고독을 의식의 흐름에 따라 해부하고 있다. 주인공 는 아무런 의욕도 없이 골방 속에 틀어박혀, 아내의 화장품 냄새를 맡아보거나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면서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고 권태롭게 보낸다. 한편, 이런 남편이 자신의 매춘 행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 아내는 그를 볕 안 드는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아스피린을 주는 척하며 수면제를 주기 시작한다. 아내가 하는 짓을 나무랄 뜻이 따로 없는 는 아내와 연애 또는 아스피린과 아달린 등을 연구하거나, 자신이 자는 동안 아내가 무슨 짓을 했을까 궁금하게 여기며 공상을 일삼는다. 그러던 중 는 문득, 날개가 돋아 현실 세계를 박차고 단 한 번만이라도 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1935년 가을 제비의 문을 닫은 이후 이상은 인사동에서 카페 쓰루’, 종로 1가에서 다방 ‘69’ ‘무기’ ‘등을 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거듭된 경영 실패, 쇠잔한 몸, 연애의 후유증 등으로 말미암은 고독이 극에 이르자, 이상은 뒤늦게 구인회에 가입하며 절친한 사이가 된 김유정에게 같이 자살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이상은 구본웅의 배다른 누이동생 변동림을 만나게 된다. 이화여전(대학교)을 나온 평범한 성격의 변동림과 결혼식을 올린다.

 

이때부터 이상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글쓰기에 매달려 1935년 일일이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작품을 쏟아낸다. 그러나 결혼한 지 석 달 만인 193610, 이상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간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도쿄에 환멸을 느끼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런 심경을 편지로 알리기도 한다.

이듬해 212일 이상은 일본 경찰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검거되고, 얼마 뒤 폐결핵의 악화로 병상에 눕는다. 이상은 스물일곱 해에 걸친 삶을 접는다.

멜론이 먹고 싶소요절 천재 작가 이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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