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3반

안녕하세요. 여러분! 항상 더불어 행복한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밝고 아름다운 6학년 3반
  • 선생님 : 배재훈
  • 학생수 : 남 13명 / 여 10명

지훈

이름 이예진 등록일 17.05.25 조회수 41

소련과 중공이 승인하고 지원한 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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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김일성은 공산정권을 수립하자마자 남한을 적화 통일시키기 위해 전쟁준비를 시작하였고 소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소련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북한에 주둔한 군사고문단과는 별도로 4,000여 명의 병력을 북한에 보냈습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5일 소련을 방문하여 남침에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였고, 1950년 3월 30일 다시 소련을 찾아가 스탈린으로부터 ‘선제 남침’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소련에서 돌아온 김일성은 5월 13일 중공의 마오쩌둥을 찾아가 소련 스탈린과의 회담내용을 설명한 후 중공으로부터의 지원을 약속받고 마침내 6월 25일 남침을 결행하였습니다.

김일성

김일성

마오쩌둥

마오쩌둥

스탈린

스탈린

6·25 남침을 위한 북한군 선제타격계획(1950. 5.29)

6·25 남침을 위한 북한군 선제타격계획(1950. 5.29)

북한군 전투명령 제11호(1950. 6.22)

북한군 전투명령 제11호(1950. 6.22)

북한의 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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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날 마침 일요일이라 대부분의 병력이 외출과 외박으로 병영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치밀한 준비 아래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북한의 침략에 국제사회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유엔은 즉각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북한군의 공격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이를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하자 유엔은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6·26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미국을 포함한 16개 국이 전투부대를, 5개국이 의료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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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진입하는 북한군 T-34 전차(1950. 6)

서울로 진입하는 북한군 T-34 전차(1950. 6)

유엔군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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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은 1945년 설립 이후 처음으로 집단 안전보장 조치에 따라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유엔군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사령관에게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여 지휘할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러나 초전부터 밀린 전세는 국군과 유엔군이 공동으로 방어태세를 구축했음에도 역전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해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였습니다. 이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반격에 나선 국군은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에 이르자 이승만 대통령은 계속 북진할 것을 명령했고 미국 정부도 유엔군의 북진작전에 관한 훈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중공은 “유엔군이 북진하면 자신들도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주장했으며, 소련은 미국의 결의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즉각적인 휴전과 외국군 철수를 제안했습니다. 이와같은 공산국가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고 뒤이어 유엔군도 북진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이 혜산진과 청진을 점령하자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북한군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기함 마운트 맥킨리호에서 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1950. 9.15)

기함 마운트 맥킨리호에서 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1950. 9.15)

유엔기를 전달받는 맥아더 장군

유엔기를 전달받는 맥아더 장군

평양으로 진격하는 국군

평양으로 진격하는 국군

서울탈환 직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군

서울탈환 직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군

중공군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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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은 1950년 10월 19일 26만 여 명의 병력을 압록강을 건너 북한에 투입시켰습니다. 이로써 중공군의 개입과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의 북한 지원으로 6·25전쟁은 공산진영 대 자유진영의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의 중공군은 인해전술과 야간 공격을 펼치며 국군과 유엔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많은 숫자의 보병으로 포위망을 구축하고 사방에서 꽹과리 등을 동원하는 심리전으로 상대방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주는 전술입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격과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퇴각하였고, 결국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한 후 평택-삼척선까지 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력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3월 15일 다시 서울을 탈환했으며, 3월 말경에는 38선까지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돌격 명령을 하는 중공군 지휘관

돌격 명령을 하는 중공군 지휘관

한국군에 투항하는 중공군

한국군에 투항하는 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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