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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전투 사진

  • 6.25 기습 전쟁을 일으켜 38선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불과 10일만인 7월 5일에 북괴군은 이내 음성군 무극리를 점령하였다. 이 무모한 적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제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예하 7연대장에게 7월 6일 05시를 기하여 적군의 남침을 차단하는 공격을 명령했다. 이때 제 7연대는 춘천에서 후퇴하여 가엽산 줄기인 고지(전승비)에서 남서쪽으로 보이는 광월리 뒷산에서 매복중이었는데 명령을 받고, 즉시 계획된 시간에 공격을 개시했다.
  • 장시간의 격전 끝에 1대대는 무극리를 탈환했으나 부대를 재편성할 사이도 없이 전진하던 중 무극리 북방 2Km 지점에서 강력한 적 예비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음성으로 철수 하였다. 적은 장호원에서 남하하여 7월 7일 주덕면 신양리를 거쳐 충주 방면으로 남진중에 있었으나 우리 제 7연대 제 1,2대대는 음성으로부터 다시 출발 무극리로 돌입했으나 적은 이미 철수하고 없었으므로 접전없이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제 1대대는 무극리-음성간을 잇는 도로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우측의 644 고지를 재 점령하여 음성-충주간 중간지대에서 적에 대비했다.
  • 적진을 관측하던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중장예편 2군 사령관 역임)은 동락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적군 연대 병력이 집결하고 학교 교정에는 수십대의 차량과 포가 포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동락초등학교의 김재옥 여교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적군을 안심시킨후 자신은 근처에서 구입한 농부의 옷으로 갈아입고 가엽산에서 매복작전중인 제2대대장에게 적 15사단 48연대와 포병대대의 배치 상황을 상세히 제보했다.
  • 김재옥 교사의 제보를 받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7월 7일 17시를 공격시간으로 정하고 제6,7중대로 하여금 적의 퇴로를 차단케하고 각 중대를 공격지점으로 이동 배치했다.
  • 한편, 김재옥 여교사로부터 무극리 일대는 국군이 철수하고 없다는 거짓 정보를 사실로 오인한 적 48연대는 안심하고 저녁 준비로 경비상황을 소홀하게 하였다. 정각 17시가 되자 제5중대가 먼저 적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 불의의 기습 공격에 적은 대피하기에 바빴고, 김대대장은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 중위(육사8기생 전 해양 경찰 대장)로 하여금 제1탄을 발포케하니, 운동장에 방열된 적의 포진지 중앙에 정확하게 명중하여 순식간에 적은 괴멸 직전에 이르러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북쪽으로 도주 중이던 적은 제 6중대에 포위되어 도처에 사체를 남기고 일부만 산중으로 도피했으나 다음날(7월 8일) 미명과 함께 실시된 아군의 소탕 작전으로 오전 8시에는 완전 섬멸의 개가를 올렸다.
  • 이 전투에서 아군이 확인한 전과는 적 사살 800여명, 포로 90명, 차량 60대, 장갑차 3대, 소총 1000여정, 박격포 35문, 기관총 47정, 포 12문, 기타의 장비와 소련제의 신장비로 무장된 강력한 부대였는바, 아군의 용맹과 김재옥 여교사의 제7연대 전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은전을 내렸으며 노획무기는 대전에서 시민들에게 전시되었고, 무기 1점씩은 UN본부로 이송하여 소련제 무기의 증거품으로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