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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문화재
작성자 이연서 등록일 18.11.05 조회수 115

우리나라 문화재

새터초등학교

5학년 2반 이연서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친구가 읽는 것을 보고 내용을 조금 읽었다. 내용을 더 읽고 싶어서 친구에게 책을 빌렸다. 아침활동 시간에 계속 읽다보니 계속해서 자꾸자꾸 읽고 싶었다. 동서양의 학문을 아우른 실학의 대가.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실학이란 사람들의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일컫는 말로, 당시 유행하던 성리학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학문)과는 상대적인 내용의 학문 이었습니다. 적약용이 처음 실학 접한 것은 15세 때였습니다. 이때 이가환과 매부인 이승훈을 통해 실학자 이익의 학문을 접하고, 성균관에 들어갈 즈음인 22세에는 이벽을 통해 서양의 자연 과학과 천주교, 서양 서적들을 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과거 시험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정약용은 1789년에 28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그 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경기 암행어사, 동부승지, 사간원 사간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그리고 1796년에는 동서양이 군사 시설 이론이 잘 배합된 수원 화성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795년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천주교를 설파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약용도 이에 연관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좌천되는 등 관직 생활이 그리 평탄하지 많은 않았습니다. 당시 천주교는 조상의 제사를 모시지 않고, 신분 제도에 정명으로 도전하는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많은 질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데 정약용의 가족과 지인들이 천주교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정약용 역시 천주교를 견제하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조가 죽은 후에는 정권을 장악한 반대파의 모함으로,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련된 역모죄까지 뒤집어쓰고 오랜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역경을 통해 정약용은 농촌 사회의 폐해와 모순을 직접 보게 되었고,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비들은 글만 읽을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땅을 나라의 소유로 하고 공동으로 농사를 지어 생산물을 나눠 갖자는 등 다양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해결 방법 들은 당시로써는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실행되지는 못했습니다. 유태 기간 내내 정약용은 도서를 하고 책을 쓰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1808년부터 1818년까지 10여 년간 머물렀던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많은 책들이 태어난 곳입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주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흥흥신서> 등 의 책 펴내며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 개혁론을 펼쳤습니다. 우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정약용은 관직으로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 평생을 보냈습니다. 유학은 물론, 자연과학, 건축기술, 의학 등 동서양의 모든 학문에 두루 걸쳐 끝없는 연구와 저술을 펼칠 그는, 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 했던 사회 개혁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목민관이 지켜야 할 것들을 알리고, 관리들의 부정, 부패를 비판한 정약용의 대표 도서이다. 이 책에서 정약용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이 오직 거둬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향할 줄은 모른다고 한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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