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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 황희 이야기
작성자 김창권 등록일 17.04.10 조회수 185
방촌 황희는 조선시대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는 평생을 관리로 지내며 원칙과 소신, 관용과 배려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는 탁월한 조정능력을 발휘한 '행정의 달인'이었다. 

왕의 개혁과 정책이 현실에 반영될 수 있도록 그 내용을 조정하고, 논쟁을 조율해서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는 청빈한 삶을 실천한 대표적인 선비로 꼽히지만,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뇌물 등에 관련한 기록 때문에 시비거리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시대 최장수 재상이지만 작은 기와집 바닥에 거적때기를 깔아 놓고 살 만큼 청렴했기에 '황희 정승'이란 애칭으로 오늘날까지 존경받고 있다.

#황희 정승의 말대로 하라 

방촌 황희(黃喜, 1363~1452)는 고려말·조선 초기 명재상이며, 청백리의 표상이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태조~세종 때까지 56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 영의정 등 주요 요직을 엮임했다. 66세에 청백리에 뽑혔다. 그는 나라의 근간이 되는 법과 제도를 정비해 새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태종이 "이 말이 만일 누설된다면, 내가 아니면 네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만큼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다.  

세종 때에는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정사를 빈틈없이 처리해 69세에 영의정에 올라 18년 동안 왕을 보필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청렴하고, 사리에 밝고 정사에 능해 역대 왕들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세자(양녕대군) 폐출 불가를 주장하는 등 때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왕과 대신의 미움을 사서 좌천과 파직을 거듭했다.  

그는 신분을 초월해 인(仁)을 실천하고 인권을 존중했다.

또 신뢰할 수 있는 법치주의에 근거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며 <경제속육전>을 편찬하고, 오늘날 소방서 같은 '금화도감'과 파출소 같은 '경수소'를 설치해 화재와 방범에 대비했다.
그는 회의에서 절대로 먼저 말하지 않았다.  

영의정이 먼저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거나 그 말이 옳다고 아부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두루 듣고, 마지막에 종합해 의견을 개진했다. 그래서 태종이나 세종은 으레 '황희 정승의 말대로 하라!'고 했다. 

다산 정약용은 "청백리란 '봉급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않고, 먹고 남은 것은 집에 가지고 가지 않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때는 한 필의 말로 조촐하게 가는 자'를 말하는데, 조선 조를 통틀어 이러한 조건에 가장 부합되는 청백리는 황희 정승이다"고 했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은 "젊을 때는 대간과 승지로서 바른 말을 하다가 서너 번이나 면직, 좌천되고, 두 번 감사(강원도, 평안도)로 나갔을 때는 관리들은 두려워 하고, 백성은 그리워했다"며 "오랜 경륜과 신중한 태도로 4군 6진의 개척과 대마도 정벌을 실제적으로 뒤에서 지휘했다"고 말했다. 
그는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파주 반구정에서 유유자적 인생을 관조하며 풍류를 즐겼다. 90세까지 장수하다 파주 탄현 금승리에 안장됐다.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 
그에 관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세종이 그의 집을 방문해서 낡은 옷과 다 닳아빠진 멍석을 보고는 "그 멍석은 너무 낡아 등 긁개로 쓰면 딱 좋겠구나!"라고 했다. 이 일화는 관료집단의 부정부패를 견제하는데 지금까지도 적용되며, 청백리의 표상으로 칭송되는 이유다. 

어느 날 퇴궐해서 단벌 옷을 빨았는데, 입궐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그는 갈아 입을 관복이 없어 바지와 저고리 솜을 실로 얼기설기 잇고 그 위에 관복을 덧입고 서둘러 입궐했다.

그런데 세종은 그의 관복 밑으로 비죽이 나온 하얀 것을 얼핏 보고는 말했다. "과인이 듣기로 경은 청렴결백한 것으로 아는데, 어찌 오늘은 양털 옷을 입었소?" 이에 그는 "이것은 양털이 아니라 솜입니다"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세종이 비단 열 필을 내렸으나, 그는 "백성은 흉년으로 헐벗고 굶주리는 자가 많은데 솜옷 한 벌도 과분하다"며 거절했다. 

어느 날 집안의 여종들이 싸움을 하다가 그에게 일러바쳤다. "대감마님, 손님이 먼 길을 오시느라 시장하니 음식부터 장만하는 게 옳지요?" "오 그렇지. 네 말이 옳다" 그러자 다른 여종이 "집안부터 청소하는 것이 우선 아닙니까?"라고 하자, "허허허, 네 말도 맞구나!"했다. 이를 듣고 있던 아내가 "대감, 무슨 일이든 한쪽이 옳으면 다른 쪽은 그른 법 아닙니까?"라고 하자, "허허, 부인 말도 옳소!"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두 여종은 서로의 생각을 인정하고 다툼을 멈췄다.

들판에서 농부가 소를 몰며 논을 갈고 있었는데, 농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두 마리의 소 중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 "둘 다 일을 아주 잘 한답니다" 잠시 후 농부가 귀에 대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실은 누렁소가 검정소보다 일을 휠씬 잘 합니다" "아니 그런데 왜 귓속말을 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누가 자기를 욕하고 흉보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비록 남보다는 못할지라도 열심히 일한 소의 입장에서는 마음 상할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는 이 일을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줏대도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여봐라! 김종서 대감이 앉아 계시는 의자 다리가 짧은 모양이다. 

누가 나가서 나무토막을 가져오너라!" 당대 최고 명장 김종서가 거만한 자세로 탁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다가 그의 질책을 듣고 얼른 자세를 고쳐 앉고 잘못을 사과했다고 한다.

그는 관리나 가족들에게는 엄격하지만 노비와 아이들에게는 관대한 휴머니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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