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향초등학교 로고이미지

계기교육

RSS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발명의 날(5월19일)
작성자 김지연 등록일 15.05.18 조회수 259
‘발명의 날’은 세종 23년(1441) 4월 29일(양력 5월 19일) 측우기(測雨器)의 발명을 기려 제정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농사에 큰 영향을 주는 강우의 자연현상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농사철에 대비하여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각 지방 관청에 땅속에 스며든 빗물의 양을 측정하거나 웅덩이에 고인 물을 측정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세종 23년 봄에는 가뭄과 큰비가 번갈아 기승을 부려 이런 강수 측정 방법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세종의 아들 문종이 종래의 방법 대신 일정한 크기의 그릇에 빗물을 받아 측정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 23년(1441) 8월 18일에, “서운관(書雲觀)에 대를 만들고 대 위에 깊이 2자, 지름 8치의 철기를 놓고 빗물을 받아 그 깊이를 재어 보고하게 하는 한편, 외방 각 관에서는 자기나 와기를 써서 객사 뜰에 놓고 물의 깊이를 재어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자고 호조(戶曹)가 건의하여 임금이 따랐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당초의 측우기에 미진한 점이 발견되어 이것을 개량하고 측정제도를 확정한 것은 세종 24년(1442) 5월 8일이었다. 이날 『세종실록』은 “우량 측정에 미진한 곳이 있어 조례를 다시 구성한다. 우량계의 이름을 측우기(測雨器)라고 명명하고 측우기는 길이 1자 5치, 지름 7치의 철기를 서운관의 대 위에 놓고 비가 그쳤을 때마다 주척(周尺)으로 수심을 측정하며, 강수 및 비가 갠 날과 시각 그리고 수심의 자, 치, 푼[分] 수를 정확히 재어 보고 기록한다 지방에서는 각 도, 군, 현의 객사 뜰에 두어 강우량을 치, 품까지 측정하여 보고하게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로써 강우량은 비가 멎었을 때 측정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일시와 날씨가 갠 일시를 기록하며, 수심은 약 2밀리미터 단위까지 정확하게 재는 과학적인 측정방법이 제도화되었다. 조선왕조의 측우 제도는 임진왜란 등으로 한때 주춤했으나, 영조 46년(1770) 5월 1일 측우기를 철제대신 청동으로 다시 만들어 팔도에 설치하게 하여 부활된 측우기제도는 조선왕조를 통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정조 16년(1792)부터 8년간의 강우량 통계가 기록되어 있다.
1957년 5월 19일 상공부는 측우기 발명일을 기려 매년 5월 19일을 ‘발명의 날’로 제정했으나, 1973년 3월 30일 대통령령으로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으로 ‘상공의 날’로 통폐합하여 발명사상 함양을 위한 행사를 함께 한다. 그러나 1982년 5월 19일 제17회 발명의 날부터 민간 주도로 바뀌어 한국발명진흥회가 각종 기념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이전글 성년의 날
다음글 5.18민주화운동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