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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작성자 곽중호 등록일 12.12.19 조회수 45
이것은 우리의 학교 이야기를 통해서 또는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들과 모순들을 지적한 글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바라는 것이며 원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눈과 귀를 통해 보는 학교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학생들이 불쌍해서 민원을 작성해본다. 대부분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야간자율학습(이하 야자) 은 반강제적이다. 법으로 금지되어도 편법을 쓰면서 한다. 일부 우리들 같은 막 입학한 1학년 새내기들한텐 그런 것 들이 무리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학교들이 불 참시 페널티를 주는 등 여러 방법으로 강제로 학교 끌어들여 공부를 시키고 있다. 이름이 기본 교과교육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므로 교과교육 시간에 플러스가 안 들어간다. 바로 이런 모순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학교는 교묘히 학생들을 속이고 있다. 한창 활발하고 뛰어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 대부분이 원해서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들 중 일부가 있는 고등학교에선 심지어 토요자율학습을한다. 3학년에겐 점심까지 나오니 오후까지 한다는 뜻이다. 과연 그들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일까? 과연 그들이 진실로 원해서 하는 것 일까? 그렇지가 않다. 그 내용은 밑에다 중요한 만큼 따로 여러 번 적었다. 그렇게 열심히 많이 공부 한다면 우리나라의 PISA는 단연1등이 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나라는 2등에 그쳤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도 2등을 했다. 물론 못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1등은 어디일까? 핀란드다. 우리나라처럼 이민을 많이 오지 않기 때문에 교육의 질이 높다.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우리의 교육제도는 많은 나라가 그렇게 시행하듯 경쟁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쟁은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훨씬 자연적이다. 여기서 자연적이라 함은 약육강식, 자연경쟁에서 뒤처진 자들은 고기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사자성어는 우리 사회의 실태를 여김 없이 보여준다. 더 나은 대학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경쟁한다. 이는 어느 나라에서나 있다. 핀란드에도 물론 입시경쟁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잔혹하진 않다. 그 나라엔 입시전쟁이 없다. 대학은 전문 직업(예를 들자면 반도체연구원 같은)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가는 곳이다. 당연히 경쟁은 줄어들게 되어있다. 이런 점을 본다면, 우리가 사는 나라는 미쳤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학 안 나오면 사회의 쓰레기, 이름나지 않은 대학 나와도 쓰레기 취급이다. 이렇게 약육강식이라는 철저히 원시적인 관념이 우리나라에 틀어박혀 있다. 실패와 성공을 학벌이 따진다. 돈과 명예도 달려있다. 핀란드에 비하면 정말 불쌍한 건 우리 학생들이다. 그렇다면 학벌주의 그리고 이 학벌을 좌지우지하는 건 무엇일까? 돈이다. 부잣집들은 자식들을 마치 공부기계로 안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듯 예외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빠듯한 스케줄로 인해 피곤에 절어 살고 있다. 부자들의 자식들이라면 더더욱. 즉 그들은 돈으로 지식을 집어넣고 그걸로 성공을 시킨다. 대한민국에선 그게 유산인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학원이 무수히 많아지는 원인이라고 본다. 부익부 빈익빈, 이것은 교육과도 연관이 되어있지 않을까? 최소한 위의 내용만 보아도 그렇지 않을까? 물론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확고한 꿈과 삶의 목표가 있거나 공부가 즐거운 극소수, 대한민국 1%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공부기계들이 과연 성공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커서 무엇이 될 거라는 건지도 모른 체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고 있다. 공부라는 건 노동이 아니라서 시급도 근무시간 한계라는 것도 없다. 법으로 막을 방법이 없다. 일부는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가고 그러고도 강의 한두 개 듣고 잠에 빠진다. 그들은 스트레스에 절어서 사는 것이다. 그들이 대학에 가서 사회에 나가면 이 공부들이 쓸모가 있을까? 컴퓨터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거나 큰 회사의 사장이거나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걸. 써먹을까? 아니면 최소한 기억은 할 수 있을까? 그런 지식들은 정말로 전문 직업을 가진 전문가들에게만 필요하다. 분업이란 것을 하는 세상에서 그런 것들을 모두 알 필요가 있을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데 그것들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떤 소용일까? 세상이 이런데 우리들은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것들을 왜 배워야 할까?" 라는 의구심을 한 번씩은 가져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PISA에서 1등을 한 핀란드는 그런 세부한 것들 까지 가르칠까? 가르쳐도 그건 전문가들을 육성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중졸도 기술로 인정받으면 잘나가는 그런 세상인데 고등교육은 한국과 달리 진정한 "선택"이다. 또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그 나라에도 꼴지는 있다. 하지만 꼴찌와 1등의 표준편차는 매우 작다.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이 경쟁을 교육방침으로 삼을 때 핀란드는 협동을 교육방침으로 삼았다. 1등과 꼴지의 차별과 서열이 없다. 자연히 학벌주의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어떤가. 무한경쟁으로 학생들을 혹사시키면서 1등을 뽑아내고, 그 1등만을 중점적으로 관리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2등이다. 꼴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꼴찌들이 1등의 가장 헌신적인 뒷받침임에도. 그리고 우리 학생들의 행복도도 문제이다. 핀란드 학생들에겐 공부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꿈도 못 꿀 일들이 그들에겐 일상이다. 물론 그 나라의 교육에도 문제는 있다. 학생이 교사에게 대들기도 하고 똑똑한 아이들의 재능을 잘 계발할 그런 제도들이 없다. 하지만 온고지신의 마음으로 새 것의 좋은 점 을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교육제도에 저작권이 있는가도 아니니 벤치마킹해도 된다. 뭐든지 지나친 것보다 부족한 게 낫다는 말이 있다. 뭐든지 적당히 하자는 말인데 우리교육은 지나친 것이고 핀란드 교육은 모자란 게 아닐까 한다. 우리는 그 둘을 섞어서 "적당히" 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지나친 교육의 온상인 야자의 실태를 보자. 야간자율학습은 여러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강제로"시킨다.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으로 강제 또는 불 참시 불리한 조건을 부과하므로 써 (예를 들면 야자를 빼는 조건을 까다롭게 하기도 하고 학습계획표를 짜서 그에 맞춰 공부한 것을 검사하기도 하며 어느 학원에 다니고 있다 는걸. 증명할 영수증이 필요하기도 한다.) 학생들을 학교에 붙잡아 두기도 한다. 오래 공부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아 야자를 빼려는 학생들이 계획표를 써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야자를 해야 한다는 강제에 그치지 않는다. 최소한 야간자율학습은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에 관한 요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반강제적인 방법으로 공부 시키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강제 야자보다 더욱 심한 것은 야자를 끝내고 나와 보면 있는 일이다. 학원버스가 나와 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더욱 심한 것, 학생들의 여가를 위한 주 5일제는 말 그대로 골칫덩어리이다. 덕분에 수업일수는 짧아졌지만 더 짧아져야 했다. 토요일 1, 3, 5주를 뺀 만큼의 시간보다 수업일수가 줄어든 시간이 더 짧다. 그렇기 때문에 교과교육이 한 교시 씩 늘어나고 방학은 짧아 졌다. 학생들은 교육제도에 놀아난 꼴이다. 게다가 더욱 심한 것은 교장재량으로 하는 토요 자율학습이다. 교장재량이라면 거의 모든 선생들이 찬성할 수밖에 없다. 교장은 그들의 상사이므로. 그리고 거의 모든 인문계 고등학교가 연합해서 토요자율을 한다는 곳도 있듯이 이것도 따지고 보면 반강제적이다. 학생들은 주5일제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교육열 때문에, 일부 교장과 선생들의 실적 올리기 때문에 주5일제의 취지가 무색해 졌다는 건 참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는 양은 해가 바뀔수록 늘어나고 해소할 기회나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가장 높다. 학생자살률이 높기 때문이다. 3Idiots 라는 영화를 보면 교수가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하는 대학생이 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하루에도 최소한 한명이상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도 그것이 너무나 빈번해서 취재거리도 되지 못한다. 가뜩이나 저 출산이니 인구 고령화니 하는 마당에 이는 사회의 미래에 악영향을 미칠 뿐이다. 스트레스, 이것은 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스트레스로 인한 학교폭력, 음주나 흡연, 가출, 교사에게 대드는 행위, 욕설의 사용, 우울증, 게임중독 등등의 무수한 문제가 생기고 있는데도 심지어 사회이슈로도 부각된 적도 있는데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직 그 문제만 감싸고 덮으려는 행동들은 고쳐져야 한다. 학교폭력이 좋은 예이다.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 때문에 학교폭력은 사회의 큰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학교폭력의 원인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 이렇게 수박 겉핥기식인 대안은 우리가 자라나 성인이 되면 그대로 다시 나타날 리스크가 있다. 그렇다면 대책이 없을까? 이 뜨거운 교육열을 식히고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이나마 필요하다. 그 최소한의 노력이라 함은 반강제적으로도 야자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주 5일제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토요 자율학습은 교장재량으로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 또한 보충학습을 교과교육이 끝나고 돈을 받으며 가르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자율이지만 시험에 출제하는 등 참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건 엄연한 강매행위라고 본다. 이것 또한 당연히 근절시켜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높은 교육열을 부추기는 학벌주의를 뿌리 뽑기 위한 캠페인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운동들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서 더 나가서 학생인권 문제도 심각하다. 학생들은 사랑과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일부 그릇된 교사에게 체벌을 당하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체벌이 아니라 폭력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이 체벌로 학생들에게 생긴 폭력의 응어리는 쉽게 풀리지 않고 다시 반항과 폭력으로 나온다. 이는 우리 학생들이 비행하게 되는 주원인이 아닐까 싶다. 이것 또한 근절되어야 한다. 그래서 경기지역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생겼다. 물론 처음엔 여러 부작용들이 생겨났다. 뉴스들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학생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 다녔다. 그러나 현재는 어떤가? 매스컴에서 자취를 감췄다. 초기의 부작용은 맺혀있던 억압되던 응어리의 해소가 아니었을까? 그 응어리가 시간이 지난다면 학생들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소위 일진들이라는 학생들이 탈선을 그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체벌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회악이다. 성장과정에 문제가 있다던가 하는.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은 참된 교육의 시작이 아닐까? 누군들 폭력을 당해가며 공부를 하고 싶을까. 하지만 학생인권조례가 사실상 무효화 되었다. 국회에서 개정된 학생인권조례에선 학칙에 두발, 체벌 같은 내용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또 교육감이 학칙을 인기할 수 있는 권한도 사라져서 교장은 교육감으로 부터 자유로워 졌다. 반대로 학생들의 틔워진 숨통은 다시 더더욱 조여졌다.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체벌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세계 인권선언 3항에 개인은 신체의 자유와 안전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했고 5항에서는 고문이나 모욕적인 행위를 금지했음에도 우리나라에는 체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거나 심지어 옹호하는 사람도 있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체벌이 금지된 외국들은 매우 많다. 대표 사례는 미국이다. 그곳은 우리 학생들이 가장 바라는 체벌금지가 옛날에 이루어진 국가이다. 할아버지들이 기억하는 체벌이 미국의 체벌의 마지막 역사이다. 이에 관련해 우리들 중 한명이 겪은 일이 하나 있다. 그가 고등학교 입학 전에 다녔던 말하기 위주의 영어학원의 미국인 강사 선생님이 있었다. 그가 하루는 학생들이 통제를 벗어나 수업이 안 된다고 우리 반에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체벌을 당할 두려움에 있어서 얌전하던 아이들이 감시를 벗어나자 통제를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라고 했었다. 그러자 육체적 체벌이 아직도 있냐면서 대한민국 교육은 야만적이라고 했다. 미국은 폭력으로 체벌할 시 바로 "You fired!" 라고 말한다고 한다. 이 일에서 그는 큰 문화차이를 느끼면서 체벌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느꼈다. 미국인들이 성향이 다소 거칠고 외향적인데도 체벌이 없다는데 유교문화를 받아들여 예의범절을 중요시해서 대체로 내성적인데다 부드러운 우리국민이 이렇게 거친 체벌을 받아야 할지 큰 의문이 이었다. 미국의 학생들이 받는 벌은 반성문 쓰기나 벌 청소, 부모님면담 같은 "벌"이지 "체벌"은 아니다. 신체적 폭력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듯 체벌은 실효성이 제한적이고 신체적 피해가 가는데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도 미국처럼 이런 벌을 체벌대신 줬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체벌만은 다시 확실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긴 예를 든 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인권문제에는 두발도 있다. 과거 60~70년대에는 문화질서유지라는 이름으로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을 했다. 학교에서도 그것은 시행되었다. 그 당시 장발은 사회운동의 주역 이였고 독재정권이 그를 마땅히 여길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장발단속은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쓰였다. 그리고 더 이전엔 단발령이 있었다. 단발령은 일제가 우리 민족의 뿌리를 흔들기 위해 실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독재시절의 학칙을 그대로 지켜야 하는가? 왜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그대로 물려받는가? 두발단속은 전혀 쓸모가 없다. 일부는 면학 분위기 조성과 학생이라는 상징 또는 통일감 조성 등등을 들어 두발 단속을 옹호 하는데, 과연 머리를 자른다면 면학 분위기가 조성이 될까? 통일감이 느껴질까? 요즘은 개성시대다. 어른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청소년들이 어른들의 기준에 맞춰 제한된 머리카락을 가진다면 개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교복을 입고 같은 머리를 하고 똑같은 교육을 매일 받으면 면학 분위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개성과 창의력이 사라질 것이다. 개성과 창의력이 사라진 학생들은 과거의 업적을 그대로 이어나가 발전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두발단속의 장점은 희미하기만 한데 독재정권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가장 큰 바람이자 가장 어려운 요구가 있다. 그러나 또한 가장 효과적이다. 바로 대학평준화이다. 대학마다 각각 특성화된 학과가 있다. 그런 학교끼리 모아 정보와 학생들을 교환하면 서서히 대학의 장벽이 사라지지 않을까? 이 외에도 방법은 많을 것이다. 그중 한 가지를 고르면 된다. 가장 반발이 적고 몇 십 년이 걸리든 몇 년이 걸리든 장기적으로 서서히 가는 방안으로 말이다. 물론 반발도 거세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높은 교육열에 들이붓게 되는 찬물이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지속적이고 최대효과를 내는 방법이라고 본다. 그리고 또 잘못된 교육의 뿌리를 지속적으로 흔들거리게 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SKY에 매달리지 않고 원하는 적성에 맞는 학과만 고르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아까도 말했듯이 두발자유 체벌금지 같은 것은 이미 시행되었어야 했다. 시급히 시행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디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글까? 또한 다시 한 번 강조하면 강제로 또는 반강제적인 자율학습 금지와 학벌주의 폐지, 대학평준화 등등을 실시해야 한다. 이것들은 힘든 것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나라가 잘못된 교육이 오래 굳어져서 생긴 만큼 뽑기도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해야 하는 만큼 빨리 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공부라는 먹이를 먹으며 학교와 학원이라는 우리에 갇혀서 내신이라는 변을 누고 대학이라는 도축장에서 사회인이라는 고기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특히 학생인권문제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해결해 나가야 하는 만큼 급히 행해질수록 더욱 좋다. 학생도 학생이기 이전에 한명의 시민이고 간접적으로 세금도 내고 의견을 표출하기도 한다. 또한 살아 숨 쉬는 생명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들은 미래를 이끌어 나갈 주역이며 성장 동력이므로 이 민원을 다는 이루지 못하더라도 학생인권문제와 자율의 모순을 꼭 바로잡기를 바란다. 이 점에서만은 꼭 학생들의 숨통을 꼭 틔워주기 바란다. 이 글은 학생들인 우리가 작성 하였으며 이 민원에 대해 성의를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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