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초등학교 로고이미지

공지사항

RSS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독립운동가(지청천장군)
작성자 회남초 등록일 19.10.28 조회수 169

지청천(池靑天 - 1888. 1. 25. ~ 1957. 1. 15. 서울)은 1888년 1월 2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관명은 석규(錫奎)이고 아명은 수봉(壽鳳)이다.

 

일본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14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재임하던 중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국내로 돌아와 남만주로 망명한 그는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점차 만주에서 일제의 독립군 탄압이 심해지자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로 이동했던 그는 다시 만주로 돌아와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 등을 역임하며 계속해서 만주를 무대로 독립군을 이끌었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군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부임했다. 그러던 중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북만주와 동만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태로 전투를 벌였다. 그중 1933년 6월 중국항일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간도임시파견대’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대전자령 전투는 ‘군수물자 노획’이라는 측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최대 성과였다.

이후 보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전쟁을 위해 중국 관내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 지청천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무장 등을 맡았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된 한국광복군에서는 총사령으로 취임하였다. 만주 등지를 무대로 전개된 무장 독립군의 이념과 정통성을 임시정부로 계승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은 그는 한국광복군을 이끌며 일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는 대일항전 구상 아래 병력 확충에 앞장섰고 영국?미국군 등 연합군과 합작 등을 추진하였다. 그의 장남 달수와 차녀 복영도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한 후 1947년 4월 환국한 그는 1948년 5월 총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48년 8월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초대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2대 국회의원, 국방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던 그는 1957년 1월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평생을 무장투쟁과 독립전쟁에 헌신한 지청천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출처: 독립기념관(http://www.i815.or.kr/2018/scholarship/independentista.do?year=2019&month=09&sval=&tabnum=&pageIndex=) 

이전글 독립운동가(김구)
다음글 역사바로알기 계기교육자료(욱일기와 학생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