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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역사를 읽고
작성자 한일중 등록일 09.12.03 조회수 485

<독서감상문>

 

패자의 역사를 읽고

 

2학년3반6번

김우진

 

우리가 보는 드라마, 역사들은 승자에 의해 기록되어진 것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는 대부분‘승자는 선이고, 패자는 악’이라는 사고였다.이런 역사는 절대적인 진리였고, 그저 좋은 시험점수를 받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같은 사건, 같은 인물이라도 누구의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완전히 달라진다. 승자의 손을 거치며, 외세에 손을 거치여 서서히 진실이 왜곡되어가고 있는 우리역사들 중 두가지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책의 처음부분을 보면 의자왕이 3천궁녀를 두었다는 것에 대하여 비판했다.백제가 멸망했을시에 사비성의 인구는 약5만명이었다. 그 중 여자가2만5천명이라고 해도 10세부터30세까지의 인구는 약4000명정도이다. 사비성의 4000천명의 처녀들 중 3000천명이 궁녀였다? 이것은 말도안되는 일이다. 3000궁녀가 허구라는 사실은 충남 부여에 남아있는 왕궁 터에서 찾아 볼 수 가 있다. 당시 왕궁은 3000명의 궁녀가 살기에는 너무 비좁고 공간이 부족했다. 당시에 궁녀가 아무리 공간을 아껴 썼다 해도, 3천 명을 전부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렇게 3천궁녀가 허구였다는 사실은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의 사실에 대한 의문을 줄 수 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의자왕의 나이는 약60세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역사서에도 60세가 넘기 전 그가 방탕했다고 하는 내용은 역사서 어디에도 언급된 적이 없다. 오히려 삼국사기에는‘의자왕은 과단성 잇고 용감한 왕, 신중하고 사려 깊은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 의자왕이 사치와 방탕에 빠져살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라가 멸망한 이유는 의자왕의 방탕과 사치가 아니라 동맹국인 고구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는 내정으로 많은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를 막아 낼 방파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 싸움은 백제 혼자서 한 것이 되겠다. 의자왕은 강인했지만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에 눌려 사치와 방탕이라는 누명을 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광해군하면 폭군이라고 한다. 그가 폭군인 이유는 요약하면 세가지 이다.

첫째, 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둘째, 민가 수천을 철거하고 궁궐을 지었다.

셋째,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했다. 하지만 이 세 이야기는 모두 사연이 있었다. 오랑캐에게 성의를 배푼 것은 명과 후금사이에 중립외교를 편 광해군이 외교 정책을 죄악으로 본 것이고 궁궐을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의 부서진 경복궁을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다른 왕들도 궁궐을 지을 때는 민가를 많이 허물었고 중립외교정책에 방해하는 이들을 배척하기 위해 궁궐을 지은 것이다.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한 사건은 중립외교에 반발이 거세질 당시 역모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 배후가 영창대군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왕권도전을 막기 위해서라도 영창대군을 처형하고 인목대비를 폐한 것은 어찌보면 당현한 일이다. 하지만 인조반정후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하던 세력들이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광해군 보다 선조가 비열한 군주라고 생각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광해군은 전장에 나가 싸웠지만 선조는 우리땅이 아닌 명나라로 피난을 가지 않았는가!

나는 글쓴이의 이 주장에 상당히 공감하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를 왜곡된 책에 그대로 나온 것을 우린 공부하고있고 역사의 진실된 모습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의 참모습을 일깨워준다. 또 정확한 역사를 찾으면 그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덧붙여서 글을 쓴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역사를 그대로 믿지않고 속안에 있는 진실을 찾아가면서 책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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