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역사

학교역사

일제 강점기 35년간 교육의 굶주림을 받던 우리나라는 해방과 더불어 학교가 우후죽순과 같이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국민교육이 국가건설과 발전에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제천에서도 해방의 기쁨과 혼란속에서도 먼저 눈뜬것이 학교 설립이었고 당시 중등교육 기관으로는 농업학교와 여학교(해방전에는 제천여자농업고등학교라 칭함)가 있을 뿐 인문학교가 없었으므로 먼저 인문중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이에 선봉적 역할을 하신분이 곧 한필수 제천읍장이시다.
한필수 선생님은 일찌기 동경미술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였지만 한학과 서화에도 조예가 깊으셨고, 만주에서 망명의 쓰라림 속에 허덕이며 조국광복의 꿈을 안고 항일투쟁에을 하는 우리 민족의 실상을 보시고 또 직접 이들을 교도하시는 중책을 맡으셨던 분이기에 학교설립추진에도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제천중학교 건립기성회"를 조직하고 관련서류를 갖추어 1946년 9월에 제천초급중학교로 인가를 받아 동년 10월1일에역사적인 개교식을 현 충혼탑 앞,당시 중앙로1가 소재 제천유아원에서 거행하였다.

당시 선생님은 초대 한필수 교장,정역택 교감,서무 그리고 교사5명이며 운동장은 배구. 농구 연습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으며 교실 2개(일제때는 일인 소학교 였었다)에 신입생 120명 대부분이 고등과(당시 동명학교 부설)출신이거나, 아니면 비진학했던 사람들을 재모집한 것이니 비교적 연령이 많았고 아이 아버지까지 있었으며 교육에 대한 향학열은 대단하였다.

흰공(배구공)이 무슨 공인지도 모르던 시절에 배구공 1개르 구입하여 배구를 시작하니 흰공 구경은 처음인데다 몇군데 떨어진 곳을 수선해 가며 사용하였고 시합때나 새공을 만져볼 기회가 있었다.연습 1년만에 제천군 직장 대항전에서 우승을 계기로 제중배구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개교 다음해 신입생이 120명이 들어오니 교실이 부족하여 창고를 빌려 임시교실로 사용하였고 다음해 신입생이 들어오니 6학급에 교실은 4개뿐이었다.1,2학년은 한교실에서 120명이 공부를 해야 했고 통풍도 좋지않은 창고에서 120명이 봄 여름을 지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이 어려움을 해결코자 설립기성회에서 주선하여서 서부동 부지 10,000평을 확보하였다.그러나 교실 건축비 확보라는 일대 난관에 봉착하여 학생들이 군수실에가서 연좌시위도 하고 기성회비 징수에 직접 참여하는 등 갖은 진통을 겪고 천신만고로 1948년 교사가 완공되어 그해 6월에 신교사로 이전하였다.

신교사라야 목조건물에 교실 9개, 관리실 3개,숙직실,창고가 고작이었다.운동장 정리작업에는 학생들의 노력이 투입되었으며 매일 4시간만 수업하고 오후에는 3,4시간씩,높은 곳은 깍고 낮은 곳은 흙으로 매운 후 개울에서 모래나르기(1인당 8톤트럭 1대분이상)를 하여 운동장에 쌓은 360여개의 모래더미는 가히 장관을 이루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하며 공부한 학생들이 서울대학을 비롯하여 일류대학에 10명이 진학 되었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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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에 중학교 3년을 수료하지만 애초 초급중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므로 학생들의 진로가 막히게 되어 한필수 교장을 위시하여 몇분의 끈질긴 집념으로 1948년 9월1일자로 제천고급중학교로 승격 인가를 받아 모두 진학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이후 한필수 초대교장은 뜻한 바있어 5.30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열과 성을 쏟아 넣은 정든 학교를 퇴임하게 되었다.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6.25가 발발하자 교사와 학생은 다시 만날것을 기약하고 6월30일 휴교하였다.51년 수복후 학교는 UN군이 사용하므로 제천여중의 교실을 빌려
임시개교하여 수업을 하다가 UN군이 전방을 이동하므로 학교에 돌아와서 전란속에 앙상하게 남은 교실을 복구하면서 학생들의 학력보충에 전력을 다하였다.
1951년 4월 2대 강진원 교장이 취임하였고,학제변경으로 7월에 3학년 143명,4학년 88명이 졸업하게 되었다. 학제개편으로 1951년 8월31일 제천중학교와 제천고등학교가 분리되었지만 한 교정내에서 동일한 교장아래 교무행정,수업등 모든 일반 사무까지도 공동으로 운영되었으며 1952년 2월에 고등학교가 제1회 졸업생을 68명 배출하였다.특히 학생들은 1회 졸업생이라는 긍지와 사명감에 불탄 나머지 진학희망자들은 서울대학을 비롯하여 명문대에 수십명이 합격을 했다.인문계고교로서의 면모를 새로이 하고 경향에 그 명성을 떨쳐 훌륭한 전통의 기틀을 세워 놓았다.지금도 1회졸업생은 이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학급이 중학교 12학급,고등학교 6학급으로 증설됨에 따라 부득이 고등학교는 현관을 사무실로 중학교는 숙직실을 사무실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으며 월동대책으로 임시직원실 40평(흙벽돌)을 건립한 것이 좋은 경헙이 되어 중학교는 53년에 흙벽돌 교실 2동(125평)건축이 어린 학생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고 고등학교에서는 군수자재로 4교실을 운동장 서편에 신축하여 가까스로 교실부족난을 극복하였다.지금은 새로운 현대식 건물이 많이 들어서지만 당시 나이어린 가냘픈 체구로 몇차례이고 흙벽돌을 찍어 건립한 교실이 그당시 학생들, 그 동문들이 자랑스럽기만하다.

아직 낙후된 시골이지만 학교 창립때 부터 정운택 선생이 체육에 힘쓰고 이어 이달모 선생이 체육교사로 부임하면서 부터 과학진흥책의 일환으로 적립해 놓은 강당건립기금을 사용하여 57년 9월 과학실을 건립하였다.

학교체육의 전통종목인 배구가 점점 사양길에 접어들자 도에서는 필드하키를 육성종목으로 채택하여 67년에 창단을 보았고 비인기 종목이기는 하지만 선수들과 지도자의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68년부터 3년간 전국을 재패하니 이제는 제중고가 함께 필드하키의 명문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970년 권용주 교장이 취임하면서 제중고의 완전분리 작업을 수차에 걸쳐 문교부와 협의하여 74년 고등학교 신축부지를 확보하게 되었고 그해 12월에 현대식 교실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73년 3월1일자로 제천중에 최병찬 교장,제천고에 권용주 교장이 각각 취임하니 4반세기 이상을 한교정에서 동고동락해온 제중고는 완전 분립이 된 셈이다.그해 6월29일 제천고등학교는 신축교사로 이전식을 하고 새로 말끔히 단정된 교사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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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책걸상을 옮겼던 21'23회,22'24회,23'25회, 동문들은 지금도 희비가 엇갈렸던 그 당시를 회고한다.

한편 제천중학교는 고등학교가 이전한 후 정리 작업에 몰두하였다.고등학교 구교사를 개축 간이체육실로 이용,잔여 교실 철거 등 후면의 숙직실,창고,음악실,기타 노후건물을 말끔히 정리하였으며 담장,진입로,교문이전 등 본관건물수리,연못개축,기타 공사를 마무리 짓고 손질을 하니 점차 학교의 면모도 새로워졌다. 이제 양학교가 공히 인문학교로서 소임인 학력제고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한편 학교의 위상을 널리 선양할 수 있는 체육 특기종목에 주력하여 제천고에서는 연식정구,하키,태권도부를 제천중은 정구,하키,배구를 맹훈련하여 73년 전국체전에서는 제천고가 하키,태권도에서 금매달을 획득하였고,제천중은 74년 연식정구에서 우승의 영광을 차지 하였다.

이후 제중은 도내 학력 최우수학교 표창,전국 하키,배구 종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발명품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과학독후감 발표대회에서 최우수상을등 각종대회에서 명문학교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특히 94년에 준공한 과학관은 충북에서 자랑할 만한 초현대식 첨단 과학기능을 고루 갖춘 학생 과학관으로서 학생교육뿐만 아니라 관내 초중학생 그리고 학부모 및 지역민을 위한 컴퓨터 연수등 다양한 교육의 장으로 그 활용도를 넓혀가고 있으며 96년 4월17일에 개관한 다목적 체육관(400평)은 농구,배구대를 비롯한 수종의 첨단 체육시설을 완비하여 우수선수 육성과 체육 수업 및 각종 행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편 제고는 전국하키종목별선수권대회 5연패(79)를 하여 하키명문고로서 명성을 전국에 알렸으며,도서관 건립,강당준공등으로 학교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갖추어 학업에 학업에 총력하여 전국의 각계각층에서 혼신의 노력을 아기지 않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개교 62주년을 맞는 제고인들이여!
기필코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굳센의지를 다시한번 발휘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