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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다녀와서욤>_
작성자 이경혁 등록일 10.10.05 조회수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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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체험 학습 보고서

대강초등학교 6학년 2반 이경혁


 마냥 가고 싶었던 경주를 설레임을 안고 출발했다. 처음에는 대가초도 간다고 해서 안 좋았는 데 반대로 웃겨서 좋았다. 버스에서 약간의 소란? 등과 함께 경주에 왔다.

 경주는 옛날 신라라는 나라였다. 신라는 1000년의 역사가 숨신다고 했는 데 안내원의 말을 들으니 1000년이 아니고 992년 이라고 한다. 경주에 있는 무덤 즉, 신라의 릉 중에 바다에 있는 릉이 있다. 그 릉운 바다 안 돌섬에 잇는 데 문무대왕이 묻혀있는 곳이다. 경주시내에서 약36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대왕암은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 30대 왕 문무대왕의 바다 무덤이다. 문무대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 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에 장례하라. 그러면 동해의 요국룡이 되어 신라를 보호하리라” 라는 대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한 뒤 유골을 이곳에서 모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대왕암은 가까이 있는 이견대, 감은사와 서로 깊은 관계가 있으며 문무대왕의 거룩한 호국 정신이 깃든 곳입니다.

  문무대왕릉에 대해  많을 것을 듣고 다시 궁금했던 석굴암을 가보았다. 석굴암은 국보 제 24호 이며 경주 불국사의 토함산 중턱에서 동해를 바라보고 있다. 석굴암은 원래 이름이 아니고 석굴암의 진짜 이름은 석굴사이다. 석굴암은 신라 제 35대 경덕왕10년(751년)에 만들기 시작해서 23년 뒤인 774년에 완성했다. 23년이나 걸린 것을 보아 바윗속에 절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많은 노력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석굴암은 시간이 흘러 잊히고 조선 시대에는 불교를 멸시하여 자연히 사람들의 발길이 멀어 졌다. 또, 굴로 되어 있는 것이 세월이 흘러 덮여 아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금부터 95년 전 한 우편배달부가 발견하여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석굴암의 바위 벽에는 여러 모양의 조각들이 세겨져 있는 데 이를 통해 우리 조상의 예술성에 대해 감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는 불국사로 가보았다. 경주 토함산에 자리 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에 다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때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에 일본의 침략으로 대부분이 타버렸다고 한다. 불국사 안에 있는 다보탑은 국보 제 20호이고 높이 10.4m이며, 일반적인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이다. 다보탑은 경덕왕 10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4각형 돌기둥을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탑의 지붕을 받치게 하였다. 국보 제 21호인 석가탑은 통일 신라시대 전형적인 3층석탁으로 높이 8.2m이다. 동쪽 탑인다보탑과 마주보고 있으며 석가탑 또는 무영탑이라고 한다.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하는 이유가 석가탑을 지은 백제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사나녀가 남편을 만나지 못한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경주는 밤에 불을 많이 켜나서 문화재, 유물이 잘보였다. 그래서 밤에 첨성대를 보러 갔다. 첨성대는 국보 제 31호이고 지금으로부터 1350여년전인 선덕여왕 때 세워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첨문대이다. 높이가 10m가 되는 돌로쌓아 올린 묘한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된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학문과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수 있다.  경주의 신라가 1000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그 992년 동안 많은 일 있었던 일, 문화재 같은 많은 것을 알게되서 너무 좋은 추억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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