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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역사적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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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01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가고 있던 중 1929 113일 전남광주에서 통학하던 조선인 여학생을 야유하고 괴롭히던 일본인 학생과 이를 말렸던 광주고보 학생들과의 사소한 충돌이 있었다.

​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본경찰은 모든 책임이 조선인 학생들에게만 있다고 발표하며 편파적인 수사를 함으로써 학생들이 주동되었던 항일운동이 바로 그 유명한 '광주학생운동'이다. 광주학생운동은 1930년까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이 애국적인 항일운동에 참여한 학교 수가 194개나 되었으며, 참여 학생 수는 약 5 4천 여명에 달했던 3.1운동 이후의 최대의 항일 민족운동이었다.

​  충주에서는 대소원초등학교(보통학교)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에 적극 호응하였다. 대소원초등학교는 그 당시 학생 수가 약360, 교사는 6명으로 일인교사 3, 조선인 교사 3명이 있었다고 한다. 대소원 학생 만세운동은 대소원 학교 졸업생이었던 이상열, 유신득 그리고 5학년에 재학 중이던 황후길, 김상쾌, 성낙일, 조태국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대소원 성공회 주교실(당시 주교는 영국인이었다)에서 밤새워 그림물감으로 태극기를 만들었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이들은 거사일로 장날을 택했다. 거사 당일 2(날짜는 불분명함) 점심시간에 각 교실을 다니면서 4학년 이상의 학생들은 장터로 나오라고 설득하여 약100여명의 학생들이 장터로 쏟아져 나와 우체국, 금융조합, 지서앞에서 "광주학생 사건 만세" 목이 터져라 외치며 시위 행렬에 들어갔다.

 ​ 당시 광주학생 사건으로 잔뜩 긴장해있던 일제는 "대한 독립 만세" 중대한 범법행위로 단속을 크게 강화했던 때라 이를 피하기 위해 "광주학생운동 만세"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소원 지서의 연락을 받고 긴급 출동한 충주경찰서 순경들에 의해 이 날의 시위는 진압되었다. 80명의 학생들이 지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자의에 의한 참여를 주장한 15명의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 날로 훈방되었다. 이들 15명의 학생은 버스편으로 충주경찰서에 이송된 후 3일간 철저히 심문을 받은 후 9명은 석방되고 6명은 29일간 구속조치 된 후 석방되었으나 당시 학교장이던 일본인 교장에 의해 강제 퇴학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5년 대소원초등학교 정문 동쪽에 기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