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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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혜인 | 등록일 | 17.02.13 | 조회수 | 184 |
현모양처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는 인물, 신사임다. 율곡 이이라는 조선 최고의 유학자를 길러낸 신사임당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어머니상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하지만 과연 신사임당은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로만 평가 받아야 할 인물일까? 신사임당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를 키워낸 엄마였으니, 분명 엄청난 교육열로 자식들을 공부시켰을 거라 짐작하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육록 이이는 <선비행장>에서 '어머니는 책 읽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지, 억지로 공부를 시키지는 않았다'고 기록했다. 신사임당은 당시 남존여비 사상으로 여자가 학문을 하는 게 쉽지 않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서예에도 일가견을 모였다. 그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사임당의 서법은 절묘해 깨에 거북 구 자를 쓰고, 반으로 쪼갠 콩에 오언절구 한 수를 다 썼따'고 전해질 정도다. 이런 신사임당이 4남 3녀에 이르는 자식들의 교육을 손수 챙긴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공부하라'는 닦달이 아닌, 자신이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식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 이끌었따. 또한 신사임당은 자식들이 각자의 적성에 맞는 길을 걷도록 도와주었다. 그 결과, 이이는 조선 시대 최고의 학자로, 넷째 아들 이우는 명필로, 첫째 딸 매창은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신사임당은 19살의 나이에 22살의 이원수와 결혼했다. 이원수는 특출 나지 않은 집안의 평범한 양반으로, 학문에는 뜻이 없어 22살이 되도록 과거시험 준비도 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결혼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신사임당이 집안 생계도 책임져야 했다. 이를 두고만 볼 수 없던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오지 말라며, 10년간 산속에 들어가 공부하길 권했다. 이 때문에 이원수는 어쩔 수없이 산에 들어갔지만, 몇 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남편의 모습을 본 신사임당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싹둑 자르며,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어 평생 볼 수 없을 줄 알라!"는 협박까지 했다. 이에 이원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학문에 정진해, 낮은 관직이라도 얻게 되었다. 잔치를 준비하다 치마에 얼룩이 진 여인에게 초충도를 그려준 일화가 워낙 유명해서인지, 신사임당은 초충도를 잘 그린 여류 화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원래 신사임당은 '초충도'보다 '산수화'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왜 후대에는 신사임당의 산수화가 아닌 초충도만 주목 받게 된 걸까? 이건 이이의 제자였던 송시열이 이이를 우모하는 글을 쓰면서 신사임당을 '예술가'가 아닌, 작은 풀벌레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한 없이 '자비로운 어머니'로서 이미지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사임당의 산수화는 접점 묻혀버린 만면, 초충도는 더 유명해진 것이다. 신사임당은 당시 남존여비 사상이었던 시대에 여자임에 불구하고 정말 멋지게 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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